매거진 퇴사일기

스피커와 회사생활하는 법

스피커와 회사 생활하는 법

by 키르히아이스

회사에서 나는 말수가 거의 없었다. 특히 윗사람들에겐 그렇게 비추었을 것이다. 회사 내에서 별로 사적인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해 봐야 득 될 것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이건 개별 사건의 문제라기보다 우리나라 회사의 구조적 문제라고 보인다. 철저한 상명하복에 탑다운 방식의 조직운영 그것이 나로 하여금 입 다물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대응은 적절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한 번은 회사 사람들과 담소 중에 에어프라이어를 사보니 데워먹기도 좋고 쓸만하더라고 했더니 어떤 직원이 내가 요리 전문가라고 팀장에게 소문을 내서 황당했던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스피커라고 하는데 그걸 들은 팀장 역시 스피커 성향이 있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생각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는 나보고 백종원이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조직 규모가 작고 고용이 안정적일수록 남 얘기하는 분위기가 활성화된다. 왜 그렇게 남 얘기를 좋아하는 걸까? 워낙 루틴 한(일상적인) 일을 반복하는 까닭일까? 그것도 이유가 된다. 그리고 서로 워낙 관심이 많은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일이 바쁘면 일하는데 정신없을 텐데 공공기관이나 안정된 조직에서는 일보다 남 얘기하기가 더 바쁘다. 그래서 일단 소문이 나면 잡기가 어렵다.


보통 남 얘기 좋아하는 조직에서는 스피커들이 있다. 특파원처럼 조직 곳곳에 숨어서 남 얘기를 전파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발이 넓고 성격도 활달해 여러 사람들과 교분이 있고 참견도 잘한다.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조직에서 나름 선호도가 있는 편에 속한다. 이런 정보를 이용해 윗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라인 타는 데도 아주 밝다. 조직으로 봐서는 아주 비효율적인 인재지만 이래 저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아남는다.


스피커가 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성격, 하나는 필요성이다. 이 사람들은 원래 남에 대한 관심이 많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 싸웠다더라, 이번에 승진이 누가 된다더라, 팀장에 누가 온다더라 같은 이야기가 주요 소재이다. 나 같은 경우 누가 오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는 입장인데 이 사람들은 좀 다르다.


스피커는 이런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다른 사람과의 친교를 위해 쓰기도 하고 자신의 처세를 위해 활용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이런 정보를 제공한다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스피커들을 만나려고 하고 당연히 아는 사람이 많아지며 회사 내 필요한 인재가 된다. 이것을 윗사람들에게 제공했을 경우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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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소문낸 것은 사실 나한테 타격이 오는 소문은 아닌데 이것을 소문낸 스피커는 팀장과의 사적 자리에서 대화의 소재로써 활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나를 써먹은 것이다. 윗사람과의 대화 자리에서 친하게 되려면 대화를 즐겁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고 그중 최고가 남 얘기이다.


더 적극적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다. 다른 팀에서 벌어진 일, 최근 인사팀 동향 등 쏠쏠한 정보를 제공하면 윗사람은 더 좋아할 것이다. 팀원들의 동향도 좋은 소재가 된다. 마치 프락치처럼 옆에 있다가 들은 얘기를 팀장에게 고해바치는 사람도 있다. 정말 그들의 철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주말에 어디를 가고 취미가 무엇이며 잘 가는 식당이 어딘지 이런 동향이 팀장의 귀에 들어간다.


팀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스를 추적하다 보니 그 스피커가 걸렸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스피커를 조심해야 한다. 회사의 암적인 존재이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 스피커요' 하고 써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살갑게 군다. 가는 자리마다 끼어 있고 차 마시러 가자고 하거나 선물을 줄 때도 있다.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친절은 정보를 캐내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그는 모든 것을 듣고 있으며 모든 것을 발설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곤해진다. 내가 요리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팀장은 나에게 '우리 팀에서 어디 가면 XX 씨에게 요리를 시켜야겠어.'라고 말했다. 사진 잘 찍는다고 하면 가는 자리마다 불러내서 사진사를 시킨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쇼핑 잘한다고 하면 쇼핑까지 시킨다.


이러니까 회사의 인재들이 자기 능력을 감추는 것이다. 회사에서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나서는 사람을 몇이나 보았는가? 도무지 상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회사들이다. 오로지 회사의 상층부에서 찍어 눌러서 '되는 것은 더 잘되게, 안 되는 것도 되도록 만드는 게' 우리나라의 소위 '조직문화'이다. 문제는 결과가 그렇게 잘 나오는 게 아니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으로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장기자랑을 할 일이 있는데 할당이 내려왔다. 팀마다 1개씩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테마도 어느 정도 정해준다. 얼마 전 뉴스에서 어떤 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걸그룹 댄스를 시켰다고 보도해 비난이 일었는데 같이 욕하고 생각해봤더니 정작 내가 얼마 전 장기자랑에 나가 춤을 추었던 기억이 있었다. 남자도 이런 거 싫기는 마찬가지이다.


대기업에서는 춤이 생활화되어있다. 요즈음에는 많이 줄었지만 신입사원 교육의 일환으로 단체 조직력을 기른다는 미명 하에 춤이나 율동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2시 넘게 까지 춤을 추었고 실제로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친구까지 보았다. 무슨 춤을 목숨 걸고 춰야 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내가 살아있는 게 하늘의 뜻인가 싶다. 춤이라고 해서 즐겁게 추는 게 아니다. 갑자기 율동 몇십 개를 쭉 읊어주고 외우라고 한다. 딱 한번 알려주고 외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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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울 리가 만무하니 신입들은 허둥대고 각자 기억의 조각을 맞춰서 연습한 뒤 검사를 받는다. 심지어 춤을 추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딱 맞춰야 한다. 4분짜리 춤이면 4분 내에 노래와 춤이 끝나야 한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아웃이다. 아웃되면 다시 연습해서 줄 서서 기다렸다가 검사를 맡아야 된다. 이런 미친 짓이 성행했었다. 혹시 지금도 하는 곳이 있다면 삼가 동정의 마음을 표한다.


이렇게 하지 말고 자율적이고 스스로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은 없을까? 장기자랑을 할당으로 하니까 결국 힘없는 하급직원들에게 임무가 부여되고 일도 바쁜데 집에 못 가고 연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간부들은 흐뭇해한다. 이 사람들은 원래 사무실에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굴뚝에 연기가 나야 산업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코피 나게 해야 일하는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러분과 나의 간부직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라면 장기자랑 같은 행사를 추진하지도 않겠지만 굳이 하겠다면 엄청난 상금을 걸고 개인단위 모집을 하겠다. 지원자가 있으면 하는 것이고 없으면 안 한다. 자발적으로 하면 저마다 감춰놓았던 장기를 풀어놓을 것이고 잘하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혜택을 주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걸 못한다. 스스로 하게 두면 안 한다고 생각한다. 80년대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저마다 톡톡 튀는 생각과 장기들을 가지고 있다. 판만 깔아주면 더할 나위 없이 잘할 친구들이다. 그런데 그걸 못 믿고 지시만 하니 누가 참여하겠나.


하고 싶던 것도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 법이다. 스스로 하는 문화가 돼야 우리나라 회사가 창의적인 회사가 될 수 있다. 스피커 얘기를 하다가 회사의 부당한 압력에 말려드는 케이스를 말했다. 스피커에게 잘못 엮이면 이런 만행에 말려들 수 있다. 그래서 스피커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대응이라기보다 일단 활용하는 방법을 알면 좋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데 원수처럼 지낼 수 없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일단 스피커를 역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직접 가서 말할 수는 없을 때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얘기를 자꾸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경고하고 싶을 때 내가 아는 스피커에게 그 사람에 대한 경고를 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흘러가 그 사람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일단 내가 기분 나빠하고 내 얘기를 퍼뜨린 게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만 전해지면 그 사람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피커라고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기회주의자이기 때문에 만인과 평화롭게 지내길 원한다. 한쪽 편에 서지 않고 적이 되지도 않기 때문에 한번 경고하면 대부분 알아서 처신한다.


또 하나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대변인처럼 활용할 수 있다. 이때 명심할 것은 스피커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분명히 살을 붙이고 때로는 결론까지 바꿀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붙이는 살까지 감안해서 스피커를 활용해야 한다. 내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하면 결혼한다고 소문내는 게 스피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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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싶은 이야기란 소문에 대한 해명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사귄다는 소문이 낫을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경우 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을 경우 스피커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스피커들과 사이를 좋게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좋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용하는 것이다. 친한 스피커를 불러서 여느 때처럼 수다를 떨게 하고 슬쩍 내가 알리고 싶은 정보를 흘린다.


절대로 알리는 티를 내서는 안되고 슬쩍 흘리거나 둘만의 비밀처럼 말해야 한다. 스피커들은 절대로 혼자 간직을 못한다. 들은 내용이 비밀에 가까울수록 퍼트리고 싶은 욕구도 올라간다. 이 속성을 이용하면 다양한 것들을 해명할 수 있고 좋은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기도 하다. 말해주고 나면 스피커들 사이에 퍼져나갈 것이고 만약 여기서 상반되는 두 가지 설이 충돌한다면 자기들끼리 대충 정리를 할 것이다.


스피커도 언론처럼 신뢰도가 있어서 더 높은 신뢰도를 가진 스피커, 더 많은 스피커들이 주장할수록 그것이 정설이 된다. 아무 스피커나 상대해선 안되고 좀 더 신뢰도 높은 사람을 골라야 한다. 사실 가장 신뢰도가 높은 스피커는 '스피커가 아닌 사람'이다. 그리고 거의 남의 말을 안 하고 말수가 없는 사람이 스피커로써 파급력이 가장 좋다. '그 사람이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목격했고 그 사람의 한마디에 한 사람이 바보 되는 것도 보았다. 회사 생활하다 보면 정말 착하고 순한 사람이 있는데 의도치 않게 망나니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종 목을 치는 역할 말이다. 여러 가지 설이 떠돌아서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무심코 던지는 말이 최종 확증이 되어버린다. 이래서 회사 안에서의 정치도 무시 못할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스피커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온화한 사람들이라 알아채기 어렵다.


1. 우선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조심해라. 사람이 말이 많으면 실언이 많은 법이다.

2. 어떤 경우라도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을 의심해라. 남의 험담은 곧 나의 험담으로 바뀔 수 있다.

3. 쓸데없이 다른 팀, 직속상관도 아닌 상급자를 만나고 발이 넓은 사람을 조심해라. 발이 넓은 사람은 대체로 스피커인 경우가 많다. 스피커는 직급이 낮은 사람들이 많은데 입으로 큰 사람들이라 능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회사에서 중책을 맡기지는 않는다.

4. 남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이상하게 본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사람. 스피커들의 특징은 남 이야기는 하면서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것은 미끼에 불과하다.


스피커에 당하지 않고 회사 생활하기는 사실 어렵다. 몇 번 당해봐야 스피커의 위험성과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사생활이 없고 조직문화만 강조하는 우리나라 회사들의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나 조직에도 빅마우스라고 불리는 떠벌이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영향을 많이 미치는 사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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