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흐른다
1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따스하게 느껴져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빨간 단풍잎 사이로 연한 주황색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나뭇잎에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오는 색들이 사랑스럽다.
깊어 가는 가을 색(色)을 간절히 잡고 싶은 마음에 캔버스와 그림 도구를 챙겨 들고 교외로 나갔다. 가끔씩 부는 바람에 단풍잎들이 떨어지지 않으려 파르르 떤다. 가을의 막바지를 온 몸으로 버텨보려는 단풍 잎새들의 안간힘이 안쓰럽기 보다는 긴장감으로 더 아름답다. 그 긴장하고 있는 자태가 무척이나 고혹(蠱惑)적이다.
2
조용히 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즈넉이 마을을 안고 있는 청보라색 하늘이 티 없이 높아 보인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마을의 모습이 브라운색 배경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편안하고 은은하다. 멀리 강 건너 경계선이 검푸르다. 검푸른색…언젠가 본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생(生)을 마감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내민 하얀 손이 빠져 들어 갔던 바다색, 여자 주인공의 흰 목에 선명히 비치던 검푸른 빛 보석과 오버 랩 되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끼게 했던 색이기도 하다. 발 밑에선 수북이 쌓인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스락거리며 굴러다닌다. 너무도 다채로운 가을 색들이 아닌가.
자연에 순응하며 어우러진 가을 색들의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이롭기만 하다.
3
시간 속에 멈춰진 한 점이 되어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가을빛으로 반짝이며 출렁이는 색들. 단조로워 보이는 색에도 수만 가지 색의 알갱이들이 응축되어 하나의 색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치의 오차 없는 색의 마술이 아닌가.
어찌 이와 같은 색의 균형과 조화가 내 앞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섭리(攝理) 속에 사랑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있기에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발에 치이는 돌멩이에도 고유의 색이 있고,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 역시 사랑의 질서 속에 흐르는 하나의 색이 아닌가.
주위를 둘러본다. 그 흐름에 어색하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것은 나 하나뿐이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나뭇잎 같은 나를 발견한다. 지금까지 나는 자연과의 조화를 무시한 채 나만의 색을 고집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그러함에도, 사랑은 나를 탓하지 않고 묵묵히 넉넉함으로 품어주었나 보다.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색을 모두 바꾸려 했던 모습을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으로 쓰다듬어주고 다독거려 주었고, 마치 혼자인 듯한 고독감에 세상을 온통 나 하나의 색으로 채워야 했을 때도 사랑은 언제나 곁에서 배경색이 되어 주었나 보다. 일상의 반복되는 규칙에 길들여져 나의 색이 빛을 잃어 갈 때도 사랑은 온유함으로 균형을 잡아 주었나 보다. 오직 내 눈길이 머물길 기대하며, 색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거부감 없이 받아 들여 사랑으로 흘러나오길 바라며, 긴 시간들을 오래 참음으로 본을 보여 주었던 건 아닌지….
4
이제 나는 들켜버린 나를 내려놓고, 욕심 없고 정직한 사랑의 신묘막측(神妙莫測) 속으로 들어가 잠긴다. 그 속에 녹아 단풍이 되고, 하늘이 되고, 강물이 된다.
멀리서 바람이 인다. 강물이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발밑으로 와 속삭인다.
“ 사랑합니다.”
아… 그 고백에 내 가슴은 환해지고, 비로소 나는 나로 돌아온다. 부끄러움으로 붓을 든다.
한 폭의 그림 속으로 강물이 흐른다. 나도 흐른다. 사랑이 흐른다.
(2004년 창작수필 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