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워지면 사랑도 지워질까
친구들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맥을 홀짝이며 어떻게 죽는 편이 그나마 덜 고통스러울까, 얘기하다가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 건 치매는 죽어도 싫다는 것. 기억을 잃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술 먹은 다음날 블랙아웃 되는 것도 무서운데 내가 살아왔던, 그리고 사랑했던 기억들을 잃는 건 상상만으로도 공허해진다고. 그러니 우리 술 적당히 마시자며 급하게 마무리.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봤다. 며칠 내내 영화 속 장면과 대화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학교 영화관에서 처음 봤던 스무살 시절에는 그냥 사랑 이야기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봤던 것 같은데, 이게 이런 영화였나. 서른살 넘어서, 연애 3번 이상 하고 나서 봐야 하는 영화라더니. 최근 기억부터 지워지는 것을 보면서 얼마 전 이야기 나눴던 치매를 떠올렸다. 비록 선별적이진 않지만 치매로 인한 기억 상실도 최근 기억부터 지워지곤 하니까.
치매 환자나 그의 주변인이 겪어야 하는 아픔은 나 자신,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천천히 분해되어 사라지는 고통'으로 자주 묘사되곤 한다. 그만큼 기억이라는 요소가 누군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거겠지. 문득 궁금해진다. 기억이 지워지면 사랑도 지워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서 사랑했던 감정까지 함께 지워지게 되는 걸까.
영화 속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웠지만 거짓말처럼 또다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부분적인 기억은 지웠을지언정 자신의 가치관, 성향 등은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니 상대를 또 마주하게 된다면 똑같은 이유로 다시 좋아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지운 후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난 조엘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이런 연출을 보면 감독과 작가 역시도 기억을 지운다 해서 사랑했던 감정까지 리셋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던 게 아닐까.
친할머니는 치매를 오랫동안 앓았다.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잃고 점점 비어가는 그의 육체를 저미는 심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는데, 그가 유독 사랑했던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에 대한 마음만큼은 남아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빠가 찾아가 어머니, 하고 부르면 힘겹게 눈을 떠 웃으시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기같은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지언정 그를 사랑했던 감정은 무의식 속에 이렇게 끝까지 남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혹시나 나중에 내가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마지막까지 안고 갈 수 있다면 조금 덜 공허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오래된 광고 음악을 알츠하이머 환자의 치료에 활용했다. 광고용 징글은 따라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제작하는 경향이 있어, 일반적인 음악보다 더 뇌리에 각인되기 때문에 환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 영상 속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추억의 징글을 따라 부르는 모습이 뭉클..
이렇게라도 그들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