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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Sep 02. 2018

육개장 한 그릇

육개장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서면 전부 잊을 동정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향의 연기가 길을 열 듯 길고 꼬불꼬불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어느 한 지점으로 흐르는 연기는 잔뜩 억울해 보인다. 할 말이 있어 보인다. 길에서 당한 의문의 죽음엔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없다. 사인(死因)은 뭘로 적혀 있을까.

… 퍽치기? 아무리 퍽치기 한 번에 죽어버렸다지만, 그래도 사람의 사인(死因)을 그 모양으로 적진 않을 거다. 그녀의 영정사진은 얼마 전 자신이 서른이 된 기념으로 남기고 싶다며 찍었던 스튜디오 사진이다. 10년, 아니 적어도 20년을 꾸역꾸역 보내야 기뻐할 만한 그런 사진이었는데, 그녀는 서른, 딱 그 나이에 죽어버렸다. 구석엔 그녀의 어머니가 다 굽은 몸을 더욱 구기며 앉아있다. 한쪽 무릎을 올리고, 한쪽 팔로는 올린 무릎을 감싸 안았다. 무너져 내린 눈가엔 여전히 물이 줄줄 샌다.


오래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키우셨다나 봐. 아이고, 불쌍해서 어째. 사방에선 죽은 여자에 대한 가정사가 난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바람을 피웠대, 그래서 한 대리가 결혼을 질색했잖아! 어머니가 혼자 고생한 거 갚겠다고 이제 호강시켜 드릴 일만 남았다고 그러더니…… 이렇게 가버리네. 나는 시뻘건 육개장에 밥을 통째로 빠트려 휘휘 저으며 그녀의 어머니를 흘긋 훔쳐봤다. 이 정도면 들릴 것 같은데. 결코 개입할 의지가 없는 겉치레 말들이 눈치 없이 끊이질 않는다.

육개장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서면 전부 잊을 동정, 자극적인 뉴스 앞에서 혀를 끌끌 차듯 성의 없는 참견.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 할 안도, 당신들의 가족을 보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정도로 말하고 그칠 간사한 걱정. 내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폭력적인 말. 죽은 그녀의 어머니 허리가 굽은 건 아마 그 모든 말을 감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육개장은 종로의 광장시장에서 언제 한 번 먹었던 맛과 비슷했다. 어금니로 여러 번 씹어야 하는 질긴 고기, 간헐적으로 떠있는 청양 고추, 과하게 풀어진 고추장과 목에 이따금씩 걸리는 고춧가루. 삼켜지지 않는 칼칼함이 성대에 어쭙잖게 남아있는 불편함까지 비슷했다. 나 또한 육개장을 핑계로 폭력적인 생각을 한다.

딸은 하필 육개장 앞에서 내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아직 살아있는 내 딸. 퍽치기를 무사히 피해간 내 딸. 어느 회사에서 신 대리로 불릴 내 딸. 홀아버지 밑에서 잘 자랐다는 말을 들을 내 딸. 예쁜 내 딸. 다행히 살아서 문제없이 결혼할 내 딸.

내 딸은 이런 일 당하지 않아야지, 그럼. 우리 딸이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럼.

콜록콜록! 전무 님, 괜찮으세요? 기어코 성대에 걸린 간질 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우악스러운 기침을 뱉었다. 밥알이 사방으로 튀어도 모두 내게 휴지를 건넬 뿐이다. 나는 그런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그럼, 그래야지.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부장 시절, 친구로 지내던 동기 놈을 내쫓고 얻은 자리다. 나보다 일 잘하던 동기와 부장을 이간질시켜 얻은 자리다. 당시 부장은 현재 부사장이다. 부사장은 여전히 날 아낀다. 동기와 이간질을 시켜서 나를 아낀다. 동기는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눈 내리는 골목길에서 멱살을 잡았다. 막 고등학생이 된 딸이 맨발로 뛰쳐나오자 나를 놓았다.


그래, 너도 혼자 힘들었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동기는 말없이 뒤돌아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우리 딸이 뭘 잘 못했다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 딸만큼 열심히 산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생각을 멈췄다. 그녀의 어머니의 굽어진 가슴에서 짓눌린 울음이 꺽꺽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김 부장과 최 대리였다.

김 부장과 최 대리는 같은 라인으로 한 대리를 싫어했다. 최 대리는 자신보다 일 잘하는 한 대리를 싫어했고, 김 부장은 최 대리를 예뻐해서 한 대리를 싫어했다. 한 대리는 알면서도 김 부장과 최 대리에게 잘했다. 김 부장에겐 부장이라서 잘 했고, 최 대리에겐 김 부장에게 예쁨 받는 사람이라 잘했다. 회사에 한 대리 편은 들어온 지 고작 3개월 된 신입 여직원 둘 뿐이었다. 반년만 지나면 모두 힘없는 한 대리를 멀리했다. 한 대리는 힘이 없어서 모두와 멀었다.


추운 날씨에 육개장이 식었다. 반도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놨다.


밖에서 다른 걸 드실까요?

눈치 빠른 김 부장이 어느새 곁에서 말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속이 좀 안 좋네.

소화제를 사다 드릴까요?

아니, 됐어요.

그래도…….

됐다니까.


최 대리가 김 부장과 나를 흘긋거렸다.

김 부장은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네, 하곤 담배를 핑계로 밖으로 나갔다.


대리와 전무는 어떤 직급보다 멀지만, 한 대리는 유독 나에게 가깝게 굴었다. 내가 혼자서 딸 하나를 키웠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부터다.


처음엔 혼자 딸을 키우느라 힘드셨을 거 같다느니, 나는 어머니라 괜찮았는데 사춘기 땐 아버지라 더 힘들었을 것 같다느니 하며 아는 척을 해오더니, 어느 날부턴 마주치기만 하면 나이를 먹는 게 기쁘다느니, 괴롭히는 몇 사람이 있어도 생각했던 커리우먼 모습이라 충분히 행복하다느니, 회사 생활이 원래 이런 게 아니겠냐며 이제 효도를 할 수 있다느니 하는 시키지도 않은 말들을 멋대로 머릿속에 넣어두고 떠났다.


한 대리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탓일까. 한 대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한 대리의 어머니는 토닥임도 없이 여전히 히끅거리고 있다. 나는 그녀의 들썩이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어선다.


일어서는 순간, 남는 생각은 하나였다.


퍽치기를 무사히 피해간 내 딸,
육개장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서면 전부 잊을 동정.


타인에게 쓰는 고작, 그만큼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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