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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May 02. 2019

세상은 흘러가더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보내는 편지


아흔이 넘은 몸뚱이를 이끌고 벤치에 굽은 허리를 세우고 앉아보았소. 젊고 어린 소리들이 바람에 뒤섞여 불어오는데 오래간만에 기분이 달뜨더군. 당신 생각이 유난히 많이 나는 평화로운 오후였소.


세상은 아무렴 잘 흘러가더이다. 

당신을 잃고 상실의 슬픔에 시간을 자꾸만 거꾸로 되돌렸는데, 기억이 아무리 뒷걸음질 쳐도 당신이 되돌아오진 않더군. 처음엔 가슴이 저릿하여 서글프기만 하던 당신의 부재가, 이제는 한낮에 불어오는 분분한 바람처럼 한 꺼풀 흘려보낼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오. 당신을 잃었으나 살아생전 당신을 곁에 두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홀로 다독이는 법도 배웠지. 참으로 기특하지 않소.


세상은 잘만 흘러가더이다.

애동 애동 걷던 손녀가 제 할아비를 보고 울지 않을 때가 될 때까지 가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 싶어 지난 가족들을 떠올렸소. 참 서글픈 게 뭔 줄 아오. 내 부모와 형제들보다 당신과 우리의 아이들이 가슴속에서 더 진득하단 것이오. 형님도 누이도, 부모님까지 막내라며 그토록 잘해주셨는데. 내 어린 시절은 따뜻하지만 애틋함을 남겨두진 않았소. 우리의 아이들을, 그리고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좀 더 뜨겁고, 좀 더 안타깝고 미안한, 애달픈 마음이 드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지 않겠소.


여전히 해가 중천에 떠있소. 중천에 높이 뜬 해도 밤이 되면 저무는 법이 아니겠소. 세상은 온화하게 잘 흘러가고, 당신 없이 나 역시 잘 살아왔고, 나 없이도 우리의 자식들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잘 살지 않겠소. 


"......."


세상은 흘러가더이다. 

이곳은 나에게 미련이 없는데, 왜 자꾸 뒤 돌아보는지 모르겠소. 흘러가는 강둑 위에서, 남겨진 이들보다 남은 이들을 뒤로하는 강물이 더 크게 슬퍼할 줄 누가 알았소. 이제 보니 홍수는 그리움의 산물이었군 그래. 


황천길 가는 것이 서러운 건 아닌데, 남은 이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욕심이 생기니 주책이오.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눕는 자리가 천하에 원망스러웠을 터인데 그렇지 않게 해 주어 고맙소. 나, 드디어 당신 곁에 누우리다. 당신보다 오래도록 한 세상 누리고 가니 미안한 마음뿐이오.


산뜻하게 살랑이는 바람이 퍽 낯설게 느껴지는군. 버석하게 눌어붙은 살가죽은 생기 있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불어대는 바람에 나의 숨을 얹어 보내오. 그래야 당신 곁에 무사히 도착하지 않겠소. 


눈이 차근차근 감기고, 촉각만 살아있는 몸뚱이로 나는 세상에 남겨진 모든 것들을 사랑했소. 세상의 일부일 땐 몰랐던 사랑이 억울했다가,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라고 미소 지었네. 그래, 그저 흐름 속에 잘 머물다 가오. 사랑과 그리움을 안고 당신께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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