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나'는 건강할까?
나는 많은 글을 쓴다. 그 안에서 사랑, 이별, 슬럼프, 불안, 걱정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기도 한다.
'다룬다'는 것은 누군가의 부정적인 마음을 문장으로 끌어올리거나 그저 토닥이는 것을 말한다. 나는 글로써 때때로 누군가의 지지대가 되기도 하고 때때론 얼굴 모를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랬기 때문에 난 스스로 '썼던 말'을 못 지키는 순간이 오면 그 죄책감에 자꾸만 작아졌다.
내가 과연 그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던가, 나는 인생을 잘 살았던가, 잘난 척할 요량은 아니었으나 결국 입만 산 것인가 등등의 생각들이 약해진 날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그럴듯한 문장들로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고자 했으면서, 이게 농락이 아니면 무엇인가.
'진심'이라던 문장들은 약해지는 어떤 시기만 오면 내 안에서도 녹아 없어져 버렸고, 진심으로 써 내려간 글자들은 더는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의문이 들었다. 행복을 위한 강의를 하는 사람들, 육아를 가르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을 모두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일까? 했던 말을 모두 지키지 못하는 건 나뿐인가? 위로하고 있는 나는 과연 건강한가?
그러던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에서 하는 김제동 씨의 말을 들었다.
"네가 말한 만큼만 살아라, 이 새끼야."
스스로 한테 하는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김제동 씨를 보며 난 우습게도 위안을 얻었다.
아, 나도 다 지킬 순 없구나. 늘 우울함을 벗어던지는 사람일 순 없구나.
그렇다면 적어도 잘못 살지만 말아야지.
작가란 깨달음을 주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저 독자 안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상념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라는 건, '당장에 괜찮은 누군가'가 '당장에 괜찮지 않은 누군가'에게 건네는 친절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문장으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만,
누군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손을 내밀고 있겠지.
지금은 내가 아프지만, 조만간 건강한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 것이고
그 누군가가 아프다면, 나는 또 튼튼한 문장으로 다른 이를 끌어올릴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위로를 주고받고, 그렇게 마음을 얻는다.
마음이 다치는 건 여전히 두렵지만,
힘들 때마다 누군가를 위해 건네는 '위로'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었다.
위로하는 사람들.
참 따스한 세상에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