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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Mar 21. 2019

슬픔을 나누면 사랑이 된다

나의 우울한 세계



가끔 이유 모를 슬픔에 빠져들 때가 있다. 가슴에 묻어뒀던 고독, 괴로움, 질투, 배반심 등이 마치 예전부터 앓아온 질병처럼 느껴질 때.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파고 매몰되는 시간이다. 꼭 혼자라서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도 종종 나타나던 시간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파도처럼 종종 나를 덮쳤다.


연인과 손을 잡고 있는 순간에도 마음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을 때 나는 특히 더 괴로웠다. 외롭지 않기 위해 함께인 건 아니지만, 함께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워서, 원인 모를 고통에 죄책감까지 동반해야 했다. 난 이럴 때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방법을 택해왔는데, 그럴 때마다 연인은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처음엔 귀찮고 싫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 괜찮아질 수 있는데, 굳이 '함께' 힘들어지자는 게 이해되질 않았다. 사랑하는 사이엔 행동과 말투는 물론이고, 감정까지 쉽게 전염되어 버리니까. 나조차 절제못할 우울감을 그대로 덜어낼 게 분명했다. 그건 반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 불어버린 짐을 맡기는 것 같았다. 


원인 모를 우울감은 해결책도 대책 없었다.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다행이지만, 원인부터 찾아야 하는 일은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출구 없는 미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점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내가 '남'이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동안엔 일심동체여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그와 나를 동일시했으나, 사실 그와 나는 엄연한 남이었다. 제삼자보다 '조금 더 나에게 관심 있는 제삼자'일 뿐. 연인은 나보다는 객관적으로 내게 일어난 일을 바라 볼 수 있었으므로 혼돈 속을 헤맬 때마다 우울함은 공유하되, 제삼자처럼 원인을 찾아갔다.


찾아가는 과정에선 해답을 찾기도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만으로 나는 '뭐라도 했다'라는 승리감을 만끽했고, 우울함을 완전히 이겨내지 않아도 이겨낸 것 같은 기분에 취했다. 또 우울한 나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와 있는 연인 덕에 '내 편'이란 단어가 주는 든든함을 절절한 사랑처럼 느끼기도 했다. 


이겨내는 과정은 학습됐다. 나중엔 우울이 고개를 빼꼼 내밀 때마다 어차피 이겨낼 수 있단 자신감에 의연해졌고, 연인의 말 한 마디는 벼랑 끝에서 날 손 쉽게 구해냈다. 서러웠던 하루에 사랑이 채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우울한 세계는 좁아졌고, 좁은 입구에 내가 끼어들어가는 시간은 단숨에 줄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고, 털어놓음으로써 털어버리는 성질도 생겼다.


슬픔을 덜어내면 배가되어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할 줄 알았는데, 슬픔은 나눌수록 그 그릇이 작아졌다. 대화를 할수록 상쇄되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던데, 연인 간에 나누는 슬픔은 그저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슬픔을 나누면 그건 사랑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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