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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가사리 Apr 01. 2021

갑자기 사라진 사람

갑자기라뇨. 벌어질 일이 벌어졌는걸요.


4년 전 나는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었다. 3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툭 던지고 그날 단톡방을 쏙 나와버린 것이다. 집에와선 숨돌릴 틈도 없이 누군가에게 건네졌어야할 명함도 쓰레기 봉투에 넣어버렸다. 속전속결. 마찰도 없는 깔끔한 이별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깔끔한 '세이 굿 바이'가 없었다.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면 첫째 팀장이 없었고, 둘째 부장이 없었고, 셋째 동료가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난 마지막 탈출자였다.


사직서를 수리한 임원과 나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모든 과정을 처리했다. 아마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나를 특이한 사람으로 봤을지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볼법한 대규모 물갈이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탈출 대기자였기 때문. 3~4달 사이 11명이었던 팀원이 2명으로 줄어버렸다. 2명 중 한명은 경력 3년차에 진입하는 나였고, 다른 한 명은 세 달 전 임원 낙하산으로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이직이 뭔지도 몰랐다. 함께 웃다가 나를 울리기도 했던 애증의 선배들이 하나씩 떠나갈 때마다 그냥 이별이 슬프기만 했다. "으엉 선배 떠나지 마세요"하면 선배는 "너도 어서 떠나"라는 말만 남겼다. 그렇게 유쾌한(?) 마지막 술자리를 몇 번 참석하니 선배들이 반쯤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는 망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냈다. 이후 말도 안되는 업무량이 떨어지고 날 뽑아준 임원이 터덜터덜 회사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둔했고 순진했던 어린 날이었다.


짧게 이야기했지만 사직서 제출까지 4개월 동안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일이 많아 처음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일처리가 말도 안되게 빨라졌다. 깊이는 없어졌지만 별로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니 슬슬 "이게 뭐하는 건가" 싶었다. 숨이 턱에 찰 무렵 아직 미련이 남아 이직을 결정하고 탈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던 게 어느 목요일 오후 2시였는데, 당시 "전 내일부터 나오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인수인계는 마무리했고 다음주까지 후배가 필요하다면 일 관련 연락은 받겠습니다"고 했다. 별다른 인수인계가 필요하지 않은 내 업종에선 문제될 것 없는 발언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고 나서 두 가지를 얻었다. 한 가지는 말도 안되는 빠른 업무 속도. 나머지는 침몰하는 배를 감지하는 촉. 그리고 깨달은 것도 있다. 침몰하는 배 나 혼자 절대 고칠 수 없고, 기울어진 배에서 중심잡고 살아가기란 정상 생활보다 두 배 이상의 힘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커리어에 남는 것도 없다는 게 신기하다. 생계 유지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싼 깨달음이다.


이런 시간을 보내보니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돼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아니다 싶을 때 미련 없이 관두는,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마지막 탈출은커녕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악마로 신세한탄만 하면서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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