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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Oct 31. 2021

[소설] 가을산의 속삭임

 가을산이 아름답다는 건 나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녀에게 그 아름다움의 의미는 나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산에 올라 직접 아름다움을 느끼길 원했다.

 “우리가 이렇게 가을에도 산에 왔으니, 사계절의 산을 모두 와 본 거네. 처음으로 함께 산에 올랐던 게 아마 작년이었지?”

 “그럴 걸? 너랑 그맘때 처음 만났고,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네가 산에 같이 가자고 노래를 불렀었으니까.”

 언제나처럼 익숙하게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작년 겨울 소개팅 자리에서 어렸을 때부터 등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남자친구도 같이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이미 그녀의 외모에만 반해 있던 나는 얼떨결에 나도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었고, 그 거짓말 덕분에 연인이 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수시로 등산 데이트를 함께 해야만 했다.

 “맞아, 그랬었지. 산은 정말 좋아. 그렇지 않아? 오르는 것도 좋고, 바라보는 것도 좋고, 올라서 바라보는 건 더 좋고.”

 “뭐가 그렇게 좋은데?”

 지쳐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 걷다가 어디가 좋은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투와 함께 의도하지 않았던 질문이 튀어나와버렸다. 아차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해놓은 거짓말이 있어 산에 올 때마다 즐거운 티를 내려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 최근에 몇 번이나 그녀의 의심을 산 뒤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뒤를 홱 돌아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개팅 때 네가 산에 오르는 거 좋아한다고 했던 거 말이야."

 "응?"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아냐. 좀 전에 뭐라고 물어봤지?"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다시 말을 돌렸다.

 "산이 왜 좋은지 말이야."

 "아 그거였지. 왜냐면 산은 언제나 속삭임을 들려주거든.”

 “속삭임?”

 “그래. 신경 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지만 귀를 기울이면 분명 들려오니까 속삭임이지. 그것도 계절마다 다른 속삭임을 말이야. 지난겨울에 같이 산에 올랐던 거 기억해?”

 “응. 당연히 기억하지.”

 나는 그녀와의 첫 번째 산행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의 산행이었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산길에 익숙한 사람인 양 떠들며 앞장서 걷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발을 살짝 젚질렀는데도, 바보같이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정상까지 힘들게 올랐던 기억이 떠올라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겨울산은 그동안 봐왔던 것들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속삭여. 이전까지 나뭇잎들 사이로 가려졌던 풍경들을 드러내면서 말이야. 그렇게 드러나 있는 산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거든."

 "그럴듯한데? 그럼 봄에는?"

 "봄에는 차디찬 날들을 견뎌내면 언젠가 꽃피는 날이 온다는 위로의 속삭임이 들려와. 산을 오르다가 어느새 따뜻해진 공기를 들이마셔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수 있어."

 산은 언제 올라도 그때마다 다른 매력이 있어 좋다며 봄 산행 때 내게 들려줬던 말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그녀가 추구하는 방향은 산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 봐도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팔색조 같은 사람을 원했고, 내게도 그것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곤 했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기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었다.

 "음... 그리고 여름엔 마치 힘들게 노력했던 만큼 값진 결과가 있을 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숨 막힐 듯 무더운 날에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결국 정상에 다다르면, 다른 때보다 훨씬 보람차고 바람도 더 시원하게 느껴지니까."

 "맞아. 그렇게 고생해서 정상에 도착하면 기분이 좋지. 내려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말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얼마 안 되는 보상을 누리기 위해 그 고생을 하며 산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그래도 역시 최고는 가을산의 속삭임이야. 단풍은 나뭇잎이 생명이 다할 때 그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일이든, 관계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 뭐든 끝에 다다랐다 해도 최선을 다해, 또 다른 내일을 위해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거지. 올해의 단풍은 끝이지만, 내년에는 또 어김없이 새로운 이파리를 틔워내야 하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빨리 올라오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분명 웃고는 있었는데, 애써 웃음 짓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게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웃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함께 정상을 향해 걸으면서부터 그녀는 한 번도 웃지 않았고,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나 역시 말을 걸진 않았었는데, 아마도 우리는 그때부터 우리의 미래를 막연하게나마 예감했던 것 같다. 단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던 건, 분명 서로의 생각이 같았을 텐데도 산을 내려갈 생각도, 따로 걸어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정상을 향해 함께 걸어 올라갔었다는 사실이다.

 정상에 도착해 울긋불긋한 산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한참을 침묵 속에 있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환희에 젖은 채 묘사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그림에 압도되거나 혹은 감동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때의 우리에게 정상이란 특별히 의미 있는 장소가 아니라 단지 이번 걸음의 목적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별다른 대화 없이 산을 내려가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끝에 하산길에 나섰다. 분명 계속 함께였지만, 더 이상 함께가 아닌 듯했다.

 일주일  그녀에게서 그만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담담한 목소리였고,  역시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처음부터 잘못 시작된 만남이었고,  사실을 마지막 산행 도중에 깨닫게 되었던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간에 산을 내려가지 않고 굳이 정상까지 함께 올랐을까? 그렇게 오르고 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선택했으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마지막 산행을 함께 하던 그날우리에게 가을산이 속삭임을 들려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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