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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Nov 08. 2021

[소설] 겨울이 가면

“넌 좋은 사람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때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약속할게. 겨울이 가면 만나기로.”

겨울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아직 낙엽이 다 떨어지지도 않았다고! 내 항의를 뒤로 한 채 그녀는 카페를 빠져나갔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하고 울렸다.


최근에 같이 살게 된,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룸메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뭐라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지만 친구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잘 안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겠어?


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전 여자친구인 윤미를 만났다. 헤어지기 바로 전에 받았던 앨범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앨범이 왜 필요한데? 다음 남자친구 만나면 전 남친이 이렇게 잘 생겼었다고 보여주려고?” 윤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쳤어? 내 사진을 챙기려고 한 거야. 앨범에 같이 찍은 사진만 있는 줄 알아? 너는 내가 만들어 준 앨범 보지도 않았지?”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사이 윤미는 앨범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작 헤어지길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던지고서.


집에서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깨작깨작 밥을 먹다 보면 룸메가 뚱한 표정을 보며 밥맛이 다 떨어진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내 표정은 원래 그러니까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라고 하자 또다시 투덜거리며 밥이며 반찬이며 쑤셔 넣는다. 통찰력은 무슨, 관찰력이나 키우라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3월이 오자 나는 봄이 왔다고 소란을 떨며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지난번 그 카페에서였다. 그런데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그녀가 말했다.

“아직 겨울이네.” 이게 또 무슨 소리야? 3월이면 겨울 다 끝난 거라고, 다시 만나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붙잡아도 막무가내였다. 이내 그녀는 그 망할 종소리를 다시 울리며 내 곁을 떠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공원 벤치였고, 윤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깄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불러 놓고도 딴 소리라며 또다시 나를 흘겨봤다.

“아직도 모르겠어?”

“뭘 말이야?”

“아까 말해준 거 말이야. 썸녀가 자기랑 왜 안 사귀는지 모르겠다며.” 술에 취해 별소릴 다 늘어놓았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자 한숨을 쉬며 윤미가 말했다.

“다 말했어. 근데 나 같아도 이렇게 술 마시고 전여친을 불러내는 남자는 안 만날 것 같은데?”

“이건 썸녀가 날 안 불러서 만들어진 일이야. 잘 됐으면 너 부르지도 않았어.”

내 말에 윤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물었다.

“너는 봄이 언제부터라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말이야? 3월 아냐? 아니지, 이제 3월도 제법 추우니 4월부터라고 봐야 하나?”

“그게 아냐, 멍청아. 따뜻해져야만 봄인 거야. 따뜻해지지 않으면 그게 언제든 영원히 겨울인 거야.”

잠시 후 내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윤미는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천천히 보라며 지난번에 가져간 앨범을 놓고 갔다.


앨범을 펼쳐본 것은 얼마 뒤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앨범 속의 나는 무표정했고 한없이 차가워 보였다. 가끔 윤미가 화난 거 아니냐면서 옆에서 찍어보곤 했던, 그리고 그녀를 만날 때에도 보여 주던 평소의 내 모습이었다. 앨범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편지에는 낯익은 글씨로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때로는 차갑지 않았으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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