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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10. 2022

낙천주의자는 어디서 올까

낙천주의에 대한 대화를 나누거나,  대화를 어깨너머로 엿듣거나, 또는 그에 대해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글과 댓글들을 보면 낙천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엿볼  있다.


그런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낙천주의자란 자유분방한 가정환경과 구김살 없는 유년시절, 상대적으로 많은 성공의 경험 속에서 태어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자신을 낙천주의자라 칭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이다. 즉, 그와 거리가 먼 환경 속에서도 나 같은 낙천주의자가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낙천주의자가 되었어! 라고 일종의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이다. 그런 환경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뻑에 많이 취해있는 모양이다.


낙천주의자란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낙천적인 삶 속에서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사람이 낙천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낙천주의자의 필요조건은 좋은 환경이라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게도 들린다. 구김살 있는 삶을 핑크빛으로 느끼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론은 있다. 그렇다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모두가 낙천주의자일까? 애초에 좋은 환경의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고된 삶 속에서도 어딘가 빛나고 있는 부분을 잘 닦아 그렇게 밝아진 빛으로 어둠을 환히 비출 수 있다면, 그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빛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낙천주의자가 꼭 낙천적인 환경에서 태어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낙천주의자의 정의란 삶을 좋게 바라보는 사람이지,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 마음먹기에 의존하는 부분은 생각보다 크다. 행복지수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수치라는 사실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낙천주의자인 나는 마음먹기를 정말 잘한다. 그렇게 마음먹기를 통해 삶 속에서 빛줄기를 찾아내는 행위를 즐기고, 그렇게 즐기는 나를 사랑한다. 그 빛이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 증명이, 낙천주의자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내 주장에 힘을 보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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