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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05. 2021

취향의 아이러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 하고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을 할 때 고려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바로 옳고 그름과 좋고 싫음이다. 길가에 떨어진 지갑의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자신이 소유하는 것은 그른 것이며,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배달음식으로 피자를 골라서 시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옳고 그름은 기준이 명확할 때에만 적용된다. 법전에 적혀 있는 내용, 명문화된 규정 등이 그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만인이 동의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절대다수의 동의를 얻은 기준에 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준이 정해진다면 누구에 대해서든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 반대로, 일견 옳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란 그 기준이 바뀌기 전까지는 명확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다.


반면 좋고 싫음은 어떨까? 여기엔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판별의 기준이 없다. 개인마다 기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개인에게만 적용될 뿐 타인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좋고 싫음에는 옳고 그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 즉, 타인이 상대방에 대해 좋고 싫은지를 판단할 수가 없고,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좋고 싫음을 설명할 때 보통 취향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취향에는 각자의 의사를 존중받을 자유와 자격이 있다는 멋진 사실이 담겨 있지만, 이 멋진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고통을 겪는다. 그 고통은 옳고 그름과 달리 남에 대해 판단할 수도, 행위에 대한 강제성도 없다는 데서 온다. 누군가를 좋아한다 해도 그 사람이 나를 강제로 좋아하게 만들 수가 없고,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이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또한 살면서 싫어하는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분명히 싫어하는 음식인데 왜 거절하지 못하고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 그것은 타인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싫어할 수 있는 만큼,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싫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자신의 취향을 존중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할 때 우리는 서로의 취향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나 솔직하게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분명 생기기 마련이다. 이때,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싫은데 좋다고 표현한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거다. 역으로, 상대방이 나를 배려하여 좋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싫었던 적도 분명 있었을 터다.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인데 좋아하는 것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의 취향은 희생되어 버리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의사표현은 그만큼 그 진의를 알기가 어려우며, 우리는 취향을 존중받기 위해 취향을 희생당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게 된다.


그러므로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상대방의 취향을 동시에 존중받고, 존중할 수 있는 상황이 편안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취향이 같을 수는 없기에 결국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래서 좋아? 싫어? 존중과 배려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서로의 취향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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