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Jun 07. 2022

미움받고 있다면

각자는 모두 다르고, 그렇게 다른 만큼 좋은 사람의 기준도 다르다. 이는 극단적으로, 누군가는 한없이 좋아하는 사람을 누군가는 더없이 미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자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는 없다. 즉,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미움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라 호언할 수 있을까? 이를 긍정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생각이라 감히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부단히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사실 그것이 그리 대단한 의미는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란다면, 너무 위험한 바람일까?


만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되돌리려 시도하고 있다면, 그게 무의미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시도가 다른 이로부터 미움받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또한 그 시도가 자아를 억압하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관계 속에서의 괴로움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과도하게 노력할  불현듯 찾아온다. 하지만 단언하건대당신은 결코 그런 사람이   없다. 다만, 애초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낙관론에 비관론을 살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