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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09. 2023

달리기와 도장


누군가 나에게 초등학생 시절 가장 떨리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묻는다면, 나는 시험을 보고 나서 성적표를 받던 순간도, 방과 후 영어수업에 빠졌다가 엄마에게 들키던 순간도 아닌, 운동회날 달리기 시합의 출발선에 서서 담당선생님의 총소리가 언제 울릴지 듣기 위해 집중하던 순간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답할 것이다.


대체 왜 그렇게 심장이 쿵쾅댔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추측해 보자면, 학생들의 부모님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공간, 소심한 성격이었던 당시의 나, 출발신호를 기다리던 긴장되는 분위기, 거창한 행사에 참여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던 나의 달리기 실력, 그리고 그 때문에 곧 손등에 찍힐 부끄러운 도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달리기가 끝나는 지점에는 아이들의 손등에 그 등수에 해당하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들은 아이들이 들어오면 순서대로 도장을 찍어주기 바빴다. 그래서 1등으로 들어온 아이는 손등에 1이라고 쓰여 있는 보라색 표시를 가리키며 자신이 같이 달린 친구들 중에 가장 빨랐노라고 자랑하기 위해 부모님에게 뛰어갈 수 있었다.


반면 손등에 5나 6이 패자의 낙인처럼 찍히기 일쑤였던 나는, 풀이 죽어 마음이 상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곤 했다. 좋은 등수를 받았던 때가 없음에도, 그래서 기대할 것도 없음에도,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들지 않던 표시를 지우기 위해 손으로 손등을 쓱쓱 문지르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5년쯤은 지났다. 요새도 운동회를 하는지,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을 시키는지, 그리고 아직도 이런 도장을 찍어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나는 줄 세우기가 일상이었던 구시대적 발상을 버리지 못한 관계자들의 낡아빠진 생각을 열렬히 비난할 것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그 후로도 나는 족히 수십 번은 더 그때의 출발선에 섰다. 수능시험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면접을 보러 어렵게 넥타이를 매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 첫 직장에 처음 출근했을 때,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때 등. 상황은 다르지만 이러한 순간은 과거에 얼마든지 많았고, 또 미래에도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다만 수많은 경험들을 거쳐 익숙해진 덕분에, 달리기 등수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사안이 걸려 있음에도 이제는 이전처럼 떨지도, 긴장하지도 않게 되어 그다지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당사자인 나의 느낌이 다른 것뿐이다.


그래서 포용력을 발휘해 보면, 그때의 떨리던 순간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출발선에 설 순간들에 대비하기 위한 예행연습쯤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억지스러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으로 등수가 보이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 뿐, 지금도 나는 큰 틀에서 성공과 실패로 나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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