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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Dec 08. 2023

개선 혹은 혁신을 위한 제 1과제

지난 회사에서 겪었던 일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체되어 있는 사내시스템의 개선을 위해 비교적 젊은 직원들로부터 의견을 받는 자리에서의 일이었던 것 같다. 경영진에서 주관하는 사원/대리급 간담회쯤 됐을까? 제법 많은 이들이 모였고, 주관자는 어떤 의견이든 상관없으니 기탄없이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참석자들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지는 않아 보였지만, 으레 그렇듯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망설이는 분위기가 회의실에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쭈뼜대던 이들은 어떻게 아무 의견도 없을 수 있냐며, 정말 괜찮으니까 말해달라고 주관자로부터 거듭 요청을 받고 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당히 개방적인 성향인 나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만큼, 빈말로도 현실성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의견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관자는 조금 듣다가 이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 같다며 말꼬리를 자르고는 해당 의견에 대한 더 이상의 의견 청취를 거부했다.


"또 다른 의견은 없나요?"


하지만 아무리 표면적으로 비현실성이 두드러진 의견이라도,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채 검토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폐기되는 꼴을 본 참석자들은 더욱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앞선 이의 의견이 일찌감치 차단되었던 순간부터 참석자들의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체 필터링 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머리를 맞대고 조금만 발전시키면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많은 잠재성을 가진 생각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머릿속을 맴돌다 이내 사라진다. 회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진다.


"아니, 이렇게 생각들이 없단 말이에요?"


좋은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패와 시행착오 끝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디어가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조금씩 빛을 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일견 바람직하지 않게 들리는 의견조차도 최소한의 검토를 거쳐 정당하게 마무리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옥석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일단 옥석이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간담회의 분위기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창조의 씨앗은 경직된 분위기 하에서는 쉽게 자라나지 않는다. 때로는 전통양식, 고정관념, 선입견, 심지어 예의범절과 같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던 가치관의 굴레마저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을 치워 버려야 보편적이지 않은 색다른 결과물들이 두둥실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을지 몰라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조차 여전히 무겁고 경직된 분위기가 지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싶다. 섣부른 일반화일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괜찮게 들리는 의견이라도 파격적이면 일단 거부감부터 갖는 사람을 자주 접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방법보다는, 기껏해야 기존의 방법을 살짝 비트는 수준의, 큰 틀에서는 별 차이 없는 방법을 제시하는 게 훨씬 쉽게 먹히는 상황을 자주 접한다.


그래서 특히 새로운 의견을 청취하고자 할 때는, 이에 합당한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 분위기 없이는 새로운 의견을 채근해 봐야 나타날 리가 만무다. 얼토당토않은 의견이라도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각하더라도 합리적인 이유를 밝혀 적절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어떤 의견이든 받아들일 준비와 태도를 갖추었음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개선 혹은 혁신을 위한 제 1과제는 바로 개방적인 분위기의 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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