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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Feb 13. 2024

미쳤던 때와 미친 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영어선생님이 Insane과 Crazy의 차이에 대해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이 맞다면 Insane은 정신이 나간 느낌이었고 Crazy는 정신없이 몰입하는 느낌이었을 거다. 그래서 Insane은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고 Crazy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자주 쓰인다고 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내 기억이 맞았을 때 이야기다. 거의 맞을 것 같긴 한데 예나지나 영어에는 영 젬병이어서 비겁한 태도지만 확신하지는 못 하겠다.


거듭 말하지만, 어쨌거나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인생에서 Crazy했던, 뭔가에 미쳤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공부에 미쳤던 적이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적은 없었다.


첫 번째는 게임에 미쳤던 시기다. 중학교 2학년쯤부터 몇 가지 게임에 미쳐서 재학기간에는 집에 오자마자 잠들기 전까지, 방학기간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밤을 새우면서까지 게임을 했었다. 당연히 엄마는 참다 참다가 이런 나를 보고 한마디 했지만 일찍부터 잔소리와 꾸중에 익숙했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스스로 게임을 자제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계속 중독된 상태였다면 내 인생은 수능을 기점으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술과 당구에 미쳤던 시기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등학교 때 공부를 위해 참고 참았던 본능들을 폭발시켰던 나는 매일같이 함께 술을 마실 상대나 함께 당구를 칠 상대를 찾아 헤매곤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과 동기들 중에는 나와 비슷하게 술이나 당구에 미친 이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나만큼 미친 이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서 나는 오래 헤맬 필요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점심에는 공강시간마다, 더 나아가 출결만으로 F학점이 확정되는 한계까지 강의를 빼먹어가며 당구를 쳤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때 역시 내 기억이 맞다면 1학년과 2학년 때 각각 1학기 씩 학사경고를 받았던 것 같다. 강의고 공부고 시험이고 뒷전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한 번만 더 학사경고를 받으면 제적이 되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한 다음 2학년까지 마치고 바로 현역으로 입대했다. 군대에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기에 망정이지, 제적까지 당했으면 첫 번째 시기와 마찬가지로 내 인생은 역시 다른 방향을 향했을지 모른다.


전역을 하고 나름대로 학점을 메꾼 다음 다행히 괜찮은 회사에 입사했다가 몇 번의 이직을 거친 지금까지 나는 이전만큼 미친 적이 없었다. 바쁜 사회생활로 인해 여유가 없기도 했고, 또한 도중에 여자친구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얼마 전 아기를 낳는 등 가정사에서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바쁜 시기에 세 번째 시기가 찾아온 듯하다. 그것도 상당히 중증이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글쓰기다. 전에 없이 글쓰기에 미쳐 있는 것이다. 출퇴근하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글을 쓰고, 회사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글을 쓴다. 집에서는 육아퇴근을 한 다음 자기 전까지 글을 쓴다. 말 그대로 틈만 나면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이렇게 미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얼마 전 공유하기도 했던 출간계약서를 썼던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경험 때문에 온신경이 글쓰기에 쏠린 상태다. 정확히는 열심히 글을 써서 공모전에 당선되는 경험을 또 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거기에 전업작가라는 꿈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더없이 바쁜 시기에도 오롯이 미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성실성과 집중력이 부족한 나는 뭔가에 미쳐 꾸준히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하지만 태생적인 기질을 이겨내면서까지 미쳐있는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보여온 성취도와 잠재력을 나는 강하게 믿는다.


미쳐 있는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세 번째 미친 시기가 부디 평생토록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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