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해를 꼬박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1월에 한국에 들어온게 코로나 때문은 아니었고, 전신에 피부염이 울긋불긋 뒤덮었다.
들어온 날에 이제 코로나 확진자가 한두명 생긴 날이었다.
다들 나에게 운이 좋다고 했지만, 내가 여행을 고려하고 있었을 때 이렇게나 한두달 사이에 들어올 일정이 아니었기에 허탈했다.
나는 그 여행을 위해 근 일년을 타지에서 일하며 나름 버티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물론 그 안에도 좋은 일은 무척 많았다.)
고생 끝에 만난 내 사랑은 힘을 얻지 못하고, 떠났고
나는 빨간 점박이 피부염 환자가 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일찌감치 영상통화로 본 엄마는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마침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 아슬아슬한 상태라 어려운 결정 끝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걱정했던 일이 나름 잘 풀리고, 내 피부염도 몇개월에 거쳐 천천히 회복되어 갔다.
그리고 코로나 라는 상황이 커져갔고, 플랜 B를 생각하지 못 했던 나는 한국으로 오라고 한 엄마를 원망하게 되었다.
무기력함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밍기적 거릴 때
엄마는 빨래를 개라는 말에 덧붙여 몇가지 잔소리를 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그저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니깐 내가 안 들어온다고 했잖아!!”
참고 참았던 말이 그제야 나온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건 다 엄마 탓 같았다.
그뒤 2-3일을 엄마와 말을 하지 않았고, 밥도 엄마가 잠들거나 집을 비웠을 때만 먹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 않던가,
엄마는 가구를 핑계로 먼저 말을 걸어왔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미안함과 반가움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영국에 와있고, 자가격리를 10일 중 9일째 하고 있다. 평소 말이 많고 춤추고 노래하며 시끄러움을 담당하고 있는 셋째를 잘 아는 엄마는 혼자 방안에서 아무런 말없이 있는 딸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보통 새벽5시에 앞산으로 운동을 가는데, 그때 전화를 걸어온다.
별말은 아니고, 그냥 엄마 요즘 새로 시작한 일과 만난 사람들과의 일화 같은 것이다.
운동을 갈 때는 뿌꾸 라는 우리집 강아지도 같이 따라가는데, 엄마가 영상으로 비춰주는 길가와 뿌꾸가 달려오는 모습이 괜스레 찡하게 느껴진다.
그저 우리가 나누는 이 일상적인 이야기 사이에
물리적 거리감만 더해졌을 뿐인데, 별말 아닌 이야기에도
금방 눈물이 글썽여져 자리를 뒤척이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었다. 20대에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가족보다 친구가 우선이었다.
어느덧 30대가 되어보니 가족의 존재가 그토록 크게 다가오는건 내가 조금은 더 자랐다는걸까.
우리가 나누는 이 일상의 대화가
엄마와의 전화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가끔 소중한 존재를 바라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반려견도 그렇고, 부모님의 시간도 그렇다.
내가 가진 생명의 시간을 주고, 그들의 시간을 나와 함께 더 써주었으면 하는 그런 욕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