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진아(眞我),참나,불사(不死)의 진실
[장자34] 대종사(7) 천하를 천하에 감추고 / 무아(無我),진아(眞我),참나,불사(不死)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13. 대지(大地)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14.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늪에 숨겨 두고서 이를 안전하다 합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센 사람이 와서 들고 가 버립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작은 것을 큰 것 속에 감추면 그만인 줄 알지만, 거기에는 아직도 새어 나갈 자리가 있습니다.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새어 나갈 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사물의 참된 모습입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장자스러운(!) 표현들을 다시 볼 수 있어 즐겁다! 이런 대목들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장자를 읽는 최고의 줄거움이 아니겠는가! 2천 년도 더 전에 이렇게 멋드러진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물이 동양에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너무나 감사할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과장일까!
여기서 대지(大地)는 땅에 대한 표현만이 아니다. 대지는 하늘로도, 우주로도, 하나로도, 도(道)라고도, 만물의 ‘근원’ 을 뜻하는 그 어떤 표현과도 바꿀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 다만 여기서 대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의 ‘몸’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고 죽게되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대자연 어머니로서의 의미를 강조함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몸은 죽어서 땅에 묻혀서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 화장되더라도 재가 되어 흙과 같은 원소로 되돌려진다.
대자연은 우리에게 삶을 주었다. 그리고 순리대로 거두어간다. 그러니 이래도 흥이고 저래도 흥인 것이다. 삶은 좋고 죽음은 싫다, 삶은 받고 죽음은 거부할 그럴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태어남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정신 차리고 보니 태어나 있었을 뿐. 그러니 죽음을 거부하지 않더라도 하등의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스레 그저 태어나 삶을 살아가듯이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여기서 핵심대목은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새어 나갈 자리가 있을 수 없다’ 이다. 어찌 보면, 구절 그 자체로 문자 그대로만 보면 화두같은 아리송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道)는 세상 모든 계층적 개념적 구조의 최상위에 있다. 그러므로 언어와 논리도 그 하이어라키의 하위 어딘가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의 사고는 언어에 국한된다. 모든 것이 아닌 부분적일 수 밖에 없는 ‘논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에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혹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옛날 옛적, 신과 인간이 함께 어울려 살던 아주 오래전의 일이란다. 신들은 인간의 잠재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들이 가진 잠재력이 모두 깨어날 경우 신들과 같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들은 인간의 잠재력을 어디에 숨길지 고민했다. 가장 높은 산? 가장 깊은 바닷속? 천하의 어느 곳에 숨기더라도 인간들은 결국 잠재력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신들은 인간의 잠재력을 그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두게 되었다.
우리 인간 내면 깊숙히 숨겨진 잠재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원하는 것 이상의 큰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일까? 물론 잠재력을 그런 방향으로 사용하고 성취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채 백 년도 안되는 세월이면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야말로 알몸도 아닌 과거의 무거운 카르마만 짊어지고 리셋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잠재력의 최고 상태의 발현이란 결국 모든 괴로움의 가능성을 종식시킨 열반과 해탈의 상태라고 본다. 그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 -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 의 네 가지 상태를 뜻하는 사성제(四聖諦)에서 멸성제(滅聖諦)를 뜻한다. 즉 괴로움이 있는 상태,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괴로움을 소멸하는 8가지 길 중에서 세 번째 상태이다. 이것을 붓다는 다른 표현으로 ‘불사(不死)의 세계’ 라고 불렀다. 삶과 죽음을 끝없이 반복하는 순환 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린 세계이기 때문에 불사(不死)인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표현을 살펴보자.
무상(無常) 또한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은 무상에 대해서 뭔가 허무하다는 의미와 느낌으로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곤 하지만 본래 의미는 ‘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다’ 이다. 즉 만물은 형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됨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그저 개념적인 것일 뿐 세상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 중세시대에는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기에 우주는 영원하다고 믿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우주조차 생성-변화-소멸 (빅뱅-확장-수축)을 반복하는데 무엇이 영원하겠는가?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무상은 무상인데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였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 - 항상 그대로이지 않고 변하고 소멸된다 - 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반전이 하나 숨어있었는데 솔직히 처음 이 반전을 알아차린 필자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뻔했었다. 모든 것이 무상이라고 알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앎이었다. 형성된 것이 있다는 것은 형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아예 형성되지 않은 것은 무상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 의 이면에 숨은 참뜻인 것이다.
불교에서 삼법인(三法印 - 세 가지 현상적 진리) 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를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 한다. 앞에서 무상은 제행무상이므로 형성되지 않은 불사의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고, 즉 괴로움 역시도 현상적 진리에 해당되며 괴로움은 엄연히 실제로 존재한다. 이를 타파하는 길이 팔정도이고 완전히 괴로움을 해결한 상태가 열반과 해탈이다.
마지막으로 무아(無我)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다. 모든(諸) 현상(法)에는 나(我) 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또한 뒤집어 보면 현상(法) 이면에는 참나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제행무상에서 무상하지 않은 세계가 있는 것처럼 제법무아 이므로 무아가 아닌 세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혹은 주입된 생각을 바탕으로) 무상, 무상 하고 또한 무아, 무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아, 진아, 참나, 참나 라고 한다.
뭐, 길가는 사람들 붙잡고 도나 기 도나 기 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낫겠지만. ^^
부처님의 현상적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는 일체개고(모든 현상이 괴로움)가 있고 제행무상이 있고 제법무아가 있다. 그러나 그에 상반되는 ‘괴로움이 없는 불사의 세계’ 가 있다. 그런데 과연 ‘참나’ 혹은 ‘진아’ 에 대해서는 어떨까? 직접적으로 표현하신 적은 없지만 이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장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라!
천하란 모든 것이며 하나이며 도(道)이며 불사의 세계이며 ...... (뭐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근원이다.
무엇이 이 속에 감추어지지 않겠는가?
삶도 죽음도 그 모든 것을 좋다 싫다 하는 마음까지도
모두 감출 수 있는 마술사의 모자이고 망토다 (여기서 놀랍게도 토끼도 나오고 비둘기도 나온다!??).
그러니 천하는 오직 천하만이 감출 수 있을 뿐!
아니, 천하와 하나이면 무엇을 감추려들겠는가.
좋다 싫다 하는 모든 마음이 사라질 터인데!
도를 따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삶과 죽음의 그 어떤 괴로움도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므로 도를 향하여
오늘도 한 걸음!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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