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35] 대종사(8) 큰 스승 /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큰 스승
15.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온 것만 가지고도 기뻐합니다. 사람의 모양이 한없이 바뀔 수 있다만 그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사물들이 새어 나갈 수 없어서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닙니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고,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본받으려 하는데, 하물며 모든 것의 뿌리요, 모든 변화의 근원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직역하자면 변방의 늙은이(새옹塞翁)의 말이라는 뜻인데 인생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언제 어떻게 뒤바뀔지 모른다는 뜻이다.
현실적인 사건들은 시간의 흐름과 주변의 환경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호불호가 바뀔 수 있다. 좋고 나쁨의 단편적인 판단은 무의미하다. 장자는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죽음에 대해서도 ‘도에 따르면’, ‘좋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조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경향이 있다. 가족이 중병으로 평생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해도 그 죽음이 안타깝다고 여긴다. 사실 그다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더라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런 죽음을 굳이 안타까워할 이유가 있을까?
붓다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사성제(四聖諦)가 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인데 네 가지 진리를 뜻하는 사제(四諦) 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가르침의 설법은 8만4천 법문이라 하여 몹시 방대하지만 성(聖)스럽다는 표현을 붙인 것은 이 사성제가 거의 유일하다. 그만큼 불법의 핵심과 정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성제란 간단히 말하면 삶에는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이 있고, 괴로움을 완전히 해결한 상태가 있으며,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이 중 시작이 되는 항목이 ‘괴로움’ 이다. 삶 - 엄밀히 말하면 삶과 죽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과정 - 그 자체에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성제를 이야기하면 그 첫번째 반응은 이렇다. 왜 꼭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삶에는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즐거울 때도 있어. 그런 즐거움에 집중하면서 누리며 살면 되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아? - 필자의 아내의 첫 반응이기도 했다. 굳이 크게 강요하지는 않았건만 20년을 함께 해오는 세월이 지나, 현재는 바뀌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마음과 몸의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 괴로움이다. 마음이 있기에 슬픔, 비탄, 탄식, 화와 같은 괴로운 감정이 뒤따르지 않는가? 몸이 있기에 늙음, 질병, 죽음이 뒤따르지 않는가? 몸이나 마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괴로움의 씨앗이 뿌려질 밭 그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면 삶에는 즐거움도 존재하지 않느냐고?
즐거움 혹은 쾌락도 결국에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조만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지금 엄청나게 큰 행복과 즐거움을 지금 느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로또 1등에 당첨 되었다? 너무나 갈망하던 아름다운 여인과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 경험은 영원할 수 없고 그에 뒤따르는 쾌락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라지게 되어있다. 사라지면 아쉽고 그것이 계속 되기를 바라며 이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생긴다. 갈망과 집착은 괴로움이다.
불과 100여년 전인 1890년의 조선 말기의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서양인 선교사 등이 찍은 사진이었기에 대부분 서울을 비롯해 그 주변의 사람들과 풍광을 담은 사진이기에 다른 지방이나 시골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은 너무나 비참했다. 사실 조선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발명되고 대중화 되기 전 런던 등의 대도시 또한 마차를 끄는 말들이 싸는 똥으로 인해 거리는 더럽기 그지없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현재의 위생을 비롯한 풍요로움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 깨끗한 환경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문명화된 대도시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인도의 깡시골(10년 전 필자의 눈으로 직접 본 이런 곳도 조선시대 보다는 훨씬 나았다) 사람들도 지금은 휴대폰 정도는 가지고 다닌다. 그래서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부터 시작해서 경제체제 등 온갖 이유를 갖다대지만 결국 근본 원인은 ‘상대적 빈부격차’ 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면 행복해질까? (그런 사회 시스템이 가능한지도 의문스럽지만 된다고 해도 행복할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또 다른 근원적인 문제는 한 번의 삶은 반드시 다시 리셋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거의 무한히 반복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것을 윤회라고 부른다. 단 한 번의 삶이라면 이 일회적인 삶에서의 괴로움쯤 버티고 견디다 죽으면 그만이다. 아니 좀 일찍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들 무엇이 그리 큰 문제가 되겠는가. 내 몸이 죽고 내 생명이 꺼지고 내 의식이 사라지면 내가 경험하던 우주 자체가 소멸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지만 그렇지가 못하니 문제다. 흔히들 말하는 ‘업’이란 결국 인과법이므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죽이고 파괴한 그 막대한 업을 짊어지고 더더욱 괴로운 삶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전 연재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해커붓다’ 책의 저자는 붓다를 이 무한반복의 루틴에서 탈출한 해커로 비유했다.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붓다의 관점과 장자의 관점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다시 장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온 것만 가지고도 기뻐합니다.
사람의 모양이 한없이 바뀔 수 있다만 그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은 사물들이 새어 나갈 수 없어서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게 노닙니다.
일찍 죽어도 좋고, 늙어 죽어도 좋고, 태어나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
붓다의 가르침에 입각한 육도윤회의 관점에서 의식은 인간 이외에도 동물 등 무엇으로도 윤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장자 역시 사람의 모양이 한없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육도의 윤회를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대목에서 장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오면 기쁘다고 한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등 육도 중 악처(惡處, 괴로움이 더욱 큰 장소를 뜻한다. 반대로 인간과 천상계는 선처善處라 할 수 있다)를 제외하고 그저 인간으로 윤회하면 기쁘다고 여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성인은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경지에서 자유롭다’ 고 한다.
붓다 (를 비롯한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이들)는 생사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장자가 말하는 성인은 생사의 굴레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며 자유롭다.
필자는 지금까지 장자에서 붓다의 가르침과의 공통점을 계속해서 필설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차이점이 아니라 최고점에 있어서의 경지의 차이라고 해야 한다.
붓다의 깨달음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한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위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세상에서는 크고 작은 온갖 깨달음을 논하지만 - 우리 일상 속에서 아! 하는 작은 깨달음도 깨달음이라 표현하듯이 - 그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고 더 이상의 높은 수준의 것이 없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장자의 필설들을 보면 분명 그는 높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이전의 연재글에서 필자가 삼매(선정) 명상과의 유사점을 언급했듯이 많은 표현들이 높은 명상의 경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무상정등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붓다는 박사과정을 밟고 논문을 통과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 장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석사 학위자가 잘못되거나 박사 학위자의 공부와의 공통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산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등반가들과 다름 없다.
어떤 이들은 계곡길을 통해 나아가느라 물소리와 하나가 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숲속길을 통해 나아가느라 나무의 향취와 하나가 된다.
서로 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언젠가는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도에 멈추거나 낮은 봉우리에 안주해서 그곳이 정상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위 없는 깨달음이라 착각하여 멈추는 경우를 보아왔다.
분명 중간의 깨달음이라고 해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 글로 남기기 힘든 놀라운 체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젊은 시절 한때 견성(見性)이라 할만한 체험을 하고 멈출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를 넘어선 붓다의 참된 가르침의 원형을 접하고서 내가 걸어온 행적의 지표를 알고 다음 지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보통 특별한 경험을 위 없는 깨달음이라 여긴 이들은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잘못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의 인연 따라, 자신의 수준에 따라 먼 길을 돌아가게 되겠지만......
이번 글의 제목은 ‘큰 스승’ 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이라 했던가. 깨달음의 길은 너무나 멀고도 광대하기에 곳곳에 지뢰가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스승을 찾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비록 2,500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입적하셨지만 그 모든 행적과 귀한 말씀들이 5부 니까야 초기경전에 담겨서 전해져오고 있고 눈 밝은 이들은 알아볼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부디 큰 스승의 가르침으로 모든 이들이 중도에 멈추는 일 없이 정상으로,
위 없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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