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괴로움의 무한루프를 깨고 탈출한 해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이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각각의 종교를 가진 이들은 그 종교의 이데올로기 내지는 도그마로써의 신을 믿거나, 믿고 싶어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을 믿어야 하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종교라는 틀 속에서 혼자가 아님으로 위안을 얻고 뭔가 더 크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죠.
개인적인 상황이 어떻든 간에,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대인들에게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신이라는 개념은 '무無' - 없다고 완전히 부정하거나, 유일신 내지는 인격신의 개념, 이 둘 중 하나에 가까우리라 예상합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들은 다음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경우에 해당되겠죠.
첫째, 종교가 없거나 - 우스갯 소리로 '나교' 혹은 '무교' 라고 표현하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경우 신은 없다고 확신하거나, 유일신 내지는 인격신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없겠지 설마? 이렇게 애매모호한 입장일 겁니다.
둘째, 기독교이거나 - 유일신, 인격신을 믿겠죠.
셋째, 불교이거나 - 대부분 부처님을 신과 동일시 하리라 생각되네요. 부처님이 신은 아니라고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 하는 행동은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기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니까 그것이 곧 신으로 여기는 행동과 다름 없지요.
그런데 관점을 좀 넓혀서 특정 종교를 넘어선 시각으로, 마음을 열고 살펴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중첩되는 영역, 공통된 세계가 보이더라는 거죠.
첫째로 천국 내지는 천상세계에 대한 묘사에서 그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에서는 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을 찾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영계탐험가로 알려진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는 원래 천재에 가까운 18세기 스웨덴의 유명한 과학자였습니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물리치고 과학자가 된 사람이죠. 그러던 어느날 신비한 체험과 함께 살아있는 상태로 천국을 방문하고 그에 관한 방대한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세운 체계를 '스베덴보리 신학' 이라고 하지요. 정교로 인정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신학자이기도 했고, 자신이 사망할 날짜도 예언했고 그 예언이 실현되었죠.
한편 금강경, 반야심경, 화엄경, 능엄경 등 대승불교의 경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존시 설법과 활동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초기경전(빨리어 원전인 니까야와 한역 아함경)을 보면 불교의 세계관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보다보면 육도윤회의 대상이 되는 세계인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 인간계도 등장하지만 천상세계(천국)도 묘사되고 있지요.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천상계는 선하고 착하게 공덕을 지으면 환생하게 되는 욕계천상, 선정(삼매)을 닦아 높은 경지의 정신에 이르면 사후에 가게 되는 색계천상, 더욱 깊은 삼매(명상)를 통해 사후에 가게 되는 이보다 더 높은 정신의 경지인 무색계천상, 이렇게 세개의 천상계로 나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우리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원형(prototype)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천국의 주민들도 모임이 있고 각자의 생활이 있으며 도서관과 같은 시설도 존재합니다 - 성경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단순히 천국에 가면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산다 라고 두루뭉술하게 퉁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다르죠. 어린이 동화가 끝나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데요' 와 뭐가 다를까요? 그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아무튼 스베덴보리의 천국 묘사는 불교 초기경전의 욕계천상에 대한 묘사와 상당히 일치됩니다. 욕계천상은 천상계 중에서는 가장 낮은 천상이지만 그곳의 주민들도 신神인 것은 맞습니다. 인간과 비교하면 수명도 훨씬 길고 질병이 없습니다. 더 높은 천상일수록 수명은 더더욱 길어집니다. 그들에게도 각 세계마다의 왕이 있으며 직업이 있고 심지어는 마부라는 직업도 등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프로토타입, 제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이데아론의 비유를 떠올려보세요) - 흥미롭게도 현재 세계를 통해 유추해보면 운전기사나 비서 같은 직업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신들도 윤회하는 존재라고 했지요(육도윤회의 세계 안이라 영원한 것은 없고 무상無常한 존재일 뿐입니다. 제행무상 - 모든 형성된 것들은 변화를 그 속성으로 하며 결국에는 소멸됩니다). 그들도 수명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데 주변의 꽃이 시드는 등의 징조가 선행하며, 이것을 보면 신들도 엄청난 두려움에 떤다고 합니다. 더 편안하게 좋은 곳에 있다가 다음에 어디서 태어날지 모르니 (과거의 업보가 좋지 않으면 인과율에 따라 축생이 될지 지옥으로 갈지 알 수 없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번에는 주제를 신으로 옮겨봅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신이란 유일하며 영원하며 전지전능한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런 절대자로 여겨지는 신도 한편으론 굉장히 인간적이지요. 인간이 말을 안들으면 엄청나게 분노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말 잘 듣고 복종하면 기뻐하고요. 어딘가 하늘 꼭대기의 왕좌에 앉아서 자신이 창조한 아랫 세계를 내려다보며 군림하는 듯합니다. 그에게 복종하는 인간들이 죽으면 천국으로 보내서 영원히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반대로 이 시스템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다시는 어떤 기회도 없이 지옥의 불에 고통 받아야 하지요. 구교(카톨릭) 에는 연옥이라는 중간 지점도 있지만요(그런 신앙체계 하에서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어차피 신은 논리를 초월하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며 창조자니까 피조물인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불교 초기경전 중 어느 경에선가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승려가 삼매를 깊이 닦았습니다. 그래서 천상계로 올라가 그곳의 신들에게 물어봅니다.
"이 생과 사를 초월하여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법을 아시오?"
만나는 신들마다 알지 못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승려는 더 높은 천상으로 올라가서 '창조한 것을 기뻐하는 신들의 세계' 에 도달합니다.
그곳에서도 같은 질문을 하지만 그곳의 신들도 답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세계의 신들의 왕은 답을 알지도 모른다며 '창조한 것을 기뻐하는 신들의 세계의 왕' 에게 등을 떠밀죠.
결국 신들이 (대중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그곳의 왕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답을 몰라서 입장이 난처해진 왕은 승려를 조용한 곳으로 슬그머니 불러서
'나도 그 답을 모른다네. 하지만 붓다는 답을 안다고 들었네. 그에게 가서 물어보게나.'
라고 말을 하며 그 경은 끝을 맺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창조한 것을 기뻐하는 신들의 세계' 라는 식의 명칭을 보고 어떤 종교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나요?
그리고 어떤 신들은 자신의 수명이 너무나 긴 나머지 (그야말로 인간의 기준으로는 상상초월)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론에 따르면 기억하고 싶지 않기에 잊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겠죠. 아무튼 거기에 어느 정도의 창조하는 능력이 주어지고, 어떤 대상의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권력욕이 지배한다면? (그저 저의 상상력이 너무 앞서나갔을지도요? ^^)
앞에서 욕계천상은 공덕(선행)을 많이 지으면 갈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기독교는 기도를 하고 선행을 강조하지요.
기독교에 대한 신앙과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그마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선행을 행하고 10계명을 잘 지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곳이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천상이라면요? 왜냐면 불교의 관점에서도 선행을 행하고 5계 등을 지키면 누구나 욕계천상에 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서 (혹은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시스템 바탕에 깔고 있기에 천국에서의 삶도 그 공덕의 업보가 다하면 그곳에서 죽어서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마디 덧붙이면 원래의 기독교 사상에는 윤회 개념이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윤회의 교리를 삭제했다고합니다.
불교에서는 명상, 삼매(선정)를 통해서 마음을 닦는 수행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욕계천상보다 상위의 색계천상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선, 2선, 3선, 4선에 해당되는 삼매의 경지에 올라야 하고, 그보다 상위의 무색계천상에 들기 위해서는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삼매에 드는 능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합니다. 이렇게 높은 색계와 무색계 천상은 기독교 시스템 하에서는 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한 고도의 정신상태를 이룰만한 방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선행과 계율로 커버 가능한 욕계천상까지만 가능한 것이죠.
여기까지가 인간계를 초월해 아래(지옥, 축생 등)와 위(천상)를 아우르는 생과 사의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단 하나의 삶 - 지금 이 삶 - 에서 잘 하거나 잘 못하면 영원한 사후세계가 결정됩니다 -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매번의 삶의 선행과 악행으로 인해 다이나믹한 영원의 롤러코스터를 타야만 합니다. 매번 대부분 이전의 기억은 리셋되어 경험하게 될 테지만요. 기억이 리셋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지긋지긋한 생과 사의 무한반복일까요?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것이 육도윤회의 본질입니다.
'알고 보면' 진짜 지긋지긋하겠죠?
수 십, 수 백, 수 만, ......... 수 천억, 수 조, 수 경.....? 무한반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윤회라는 개념이 종교적 도그마로 굳어지기 이전부터 삼매에 능통한 고도의 정신능력자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과거생을 볼 수 있었고 미래생이 무한하게 이어지리라는 것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이해했을 겁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떻게든 희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더 나아질 거야.
조금 더 노력하면 행복해지겠지.
좋지 않은 상황들을 어떻게든 좋은 면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시간관리도 하고, 감사일기도 씁니다.
이런 일들은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절대로 하지 말라고, 의미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또한 이런 노력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정적 시각을 갖는 것과 긍정적 시각을 갖는 것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빨간 안경을 쓰는 것이나 파란 안경을 쓰는 것이나 세상을 빨갛게 보느냐 파랗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결국 우리의 노병사 -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은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에 괴로움의 속성이 서려있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늙으면 이런저런 좋은 장점들이 있어 라면서 색칠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싶은 거죠). 덧붙여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싫은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만남 등도 피하기 힘든 삶의 한 조각이고요.
어떤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인생 최고 레벨의 괴로움이라 불리는 산고의 50배의 고통을 출생시에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윤회는 이런 괴로움을 훨씬 더 크게 증폭시킵니다.
생노병사, 생노병사, 생노병사, 생노병사......
믿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중력을 거부한다고 중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죠.
삶의 속성은 괴로움입니다.
죽음의 속성도 괴로움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의 속성도 괴로움이고 죽음과 삶 사이의 속성에도 괴로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대상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살아가는 한, 괴로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고행자인 싯달타가 대각을 이루기 전에도 삼매의 최고 단계인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한, 붓다의 스승인 웃타까 라마풋따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그런 엄청난 고도의 정신능력자였지만 윤회의 무한사슬을 깨는 법은 몰랐던 거죠. 그저 지극히 고요한 삼매의 상태에 들어 지복을 느끼는 것만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싯달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무한루프를 깨는 방법을 발견하고 성취하였기에 붓다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배워서 무한루프를 깬, 적멸을 성취한 이들을 아라한이고 해탈자라 부릅니다.
석가모니 붓다 이전에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성취한 이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윤회의 어둠 속에서 헤맸을 뿐이죠.
긴 글 정리해봅시다.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세계는 일정 부분 거의 동일하고 중첩됩니다.
다만
--- 기독교의 사후세계 ⊂ 불교의 사후세계 ---
와 같은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죠.
기억하시죠?
⊂ 는 '포함된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