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궁극의 방향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삶을 빛나게 하는 죽음에 대한 고찰


속도를 자랑하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방향의 시대가 왔다.
우리가 향해야 할 마지막 방향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바로 그 깨달음이 삶을 더 빛나게 만든다.



종종 인구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방향이 속도보다 중요하다 -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야기다.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면,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하더라도 원치 않는 결과에 더 빨리 도달할 뿐이다.

예전에 한동안 유행했던 우스갯소리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어떤 장군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어느 산꼭대기에 올랐는데, “이 산이 아닌 게벼” 라고 했다는…

한낱 우스갯소리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이야기의 병사 중 한 명이 나 자신이었다면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겠는가.


더욱 극단적으로 말하면, 잘못된 방향은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다.

벼랑을 향해 달리는 삶은 결국 벼랑으로 향하고, 그 끝은 추락으로 끝난다.


돌아보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런 ‘방향’을 향하고 있다.

크게 본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하나하나의 모든 방향이 환경오염과 온난화의 주범이다.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을 배출하고 있는가.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소비하는 모든 물품들이 쓰레기로 남는다.

날마다 산더미같이 쌓여간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미세 플라스틱이 다시 우리 몸속으로 되돌아온다.

대기가 흐려지고, 온난화는 심화된다. 기후가 바뀌고 재난이 다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인위적인 문제들이 ‘방향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모든 존재의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마음에 잠시 새겨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렇다.

죽어가는 것이 오직 병든 생명일 뿐일까?

모든 생명은 결국 ‘죽음의 방향’을 향한다.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아기의 살결은 부드러웠고, 모든 관절들은 유연했다.

부러웠다.

나 또한 아직 30대의 젊은 몸이었지만 인간의 노화는 스무 살 무렵, 성장이 끝난 후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금세 그런 마음을 되돌렸다.

물론 나는 아들보다 훨씬 더 빨리 늙어가겠지만, 아들 또한 젊음을 잃고 늙고 쭈그러진 노인이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궁극의 방향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붓다는 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덫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세계의 어느 왕, 어느 절대자조차 피해 갈 수 없는, 사방팔방에서 조여 오는 벽과 같다고.


혹자는 말한다.

과학이 죽음에 도전한다고.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과학은 모든 질병과 죽음조차 극복하고야 말 거라고.

정말 그럴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런 과학에도 불구하고 따라올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것인가?

그에 따르는 물리적 사회적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오히려 행복이 아닌 괴로움을 더욱 크게 만들지는 않을 것인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안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허락하시옵소서...

- 라인홀트 니버, 평안의 기도(Serenity Prayer) 중에서


나는 다시 좋아하는 문구를 떠올린다.

우리는 모두는, 지금 여기, 당장은 궁극의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많은 이들이 직시하지 않으려 회피할지도 모르는 죽음.

그 누구도, 단 1퍼센트 아니 0.000001퍼센트도 피할 수 없는.

하지만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 언제 갑작스레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삶의 아이러니한 한 부분 중 하나는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삶이 더욱 빛나고 평안해질 수 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위의 기도문에서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안,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바꾸며 살아갈 용기.



너무나 운이 좋게도 아내와 나는 서로 잘 맞고 사랑하는 짝을 만났다.

서로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날한시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은 날 죽기는 힘들 것이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난 다음, 남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툭탁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서로 ‘내가 먼저 가야 한다’고 우기지만

- 어찌 보면 참 이기적이기도 하고, 또 나이도 5살 더 많은 남자인 내가 먼저일 확률이 높겠지만 -

결과야 누가 알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열차의 속도는 빨라진다.

느릿느릿 절반을 지나고, 삼분의 이쯤의 지점을 지나며 보니,

이제는 하이퍼튜브라도 타고 빛의 속도로 달리는 것만 같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궁극의 방향은,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할 방향의 선택은 남아있다.

누구도 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방향은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당신의 명령을 기다릴 테니.


속도? 그딴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으며 즐기면 그뿐인 것을.


그리고 때가 되면, 언젠가 노래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그러했듯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