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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부르는 비결

깃털처럼 날아든 조건 없는 행복으로

행복은 노력의 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행복을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고,
그저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 곁에 머문다.



모든 행위의 목적에는 행복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고 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든, 돈, 지식, 사랑, 명예, 관계. 인정… 결국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는 기대가 깔려있을 것이다.


행복을 향하고자 하는 목적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단세포 동물조차도 빛이나 어둠을 향하는 목적에 좋은 느낌에 그 바탕을 둔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다.

다만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할 뿐.


동물들은 단순하다.

특히나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적당한 먹이와 환경, 그리고 반려인간의 사랑과 함께라면 만족하고 충분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어떤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은 과연 어떠한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좇고, 또 쫓는다.

대부분 그 바탕에 행복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목표한 성취를 이루면 행복할 거라 여긴다.

성취는 이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설령 성취된다 하더라도 그 성취감은 잠시뿐, 다시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그런 과정은 거의 무한히 반복된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성취한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과연 행복할까?


이것은 ‘조건적 행복’에 관한 이야기다.

성취감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조건적 행복은 절대적으로 그 환경적 조건에 달려있다.

모든 조건을 갖추려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조건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그 행복은 사라진다.


그런 행복은 무상(無常)하다.

즉 항상 그대로이지 않다.




어느 고요한 날.

가벼운 깃털 하나가 날아온 적이 있다.

내쪽으로 날아온 그 솜털 같은 깃털을 잡으려 손을 내미는 순간,

내 손이 일으킨 바람이 밀어낸 깃털은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어느 날.

날아온 깃털을 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것은 가만히 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손 내밀지 않았기에 깃털은 내게 내려앉았다.

그것이 행복이다.


다만 나 자신으로 살고, 나의 일에 충실할 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굳이 ‘몰입’ - Flow -이라고 표현한 그런 상태로 살아갈 때

가끔씩, 우연찮게 깃털이 날아든다.

그것은 때로 나 자신을 스쳐 지나갈 수도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을 때도 있다.

그저 그때 난 슬며시 미소 지을 뿐.


행복하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이 행복을 줄 거라는 인위적인 노력을 덧붙인다면

결코 깃털은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역설적으로도 행복을 불러오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 행복조차도 - 원하지 않는 것.


뭔가를 위해 노력할 때를 떠올려보자.

그 일을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목적 - 돈을 벌면 행복에 가까워지겠지 - 을 가진 상태라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런 일에는 온전히 몰입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마음은 흩어지고, 앞에서 말한 온전한 ‘몰입’ 상태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마음은 ‘조건적’으로 돌아간다.


온전한 ‘몰입’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잊는다.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잊고 그 일만 남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한 편으로는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상태다.

즉 일은 이루어지고 행위자가 사라지는 것이다.

무위는 말 그 자체가 뜻하는 것처럼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행복은 깃털처럼 날아든다.

그것은 외부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

어쩌면 수많은 깃털들이 함박눈처럼 펑펑 쏟아져 내릴 수도……




내가 처음 명상에 관심을 가지던 4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명상하는 사람들을 기인(畸人)처럼 보곤 했다. 불과 40년 만에 이것이 대중적으로 ‘마음의 평화’와 유사한 단어로 뜻하게 되었으니 참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에 대한 수많은 실수들을 보게 된다.


명상을 대하는데 있어서 조차도 그것을 성취의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 단계를 성취하면 더 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 다음 단계를 성취하면 더더욱 큰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미하이칙센트의 ‘몰입’과 명상은 유사한 점이 있다.

단, 몰입은 어떤 일상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고 명상은 특정한 마음 수행의 체계라는 점에서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최근에 일본 불교 선사 스즈키 순류의 <그저 앉기를 권함> 이라는 책이 있었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제목 자체가 명상의 핵심을 꿰뚫는다고 생각한다.


앉는 것만이 명상은 아니다.

걷는 것 또한 붓다께서 강조하신 명상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방점은 ‘그저’에 있다.

이것은 조건적이지 않다.


그저 앉는다.

가만히 지켜본다.

뭔가를 하려고 마음은 계속해서 꿈틀댈 것이다.

심지어 뇌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에 빠져 - 온갖 공상의 나래를 펼 것이다.

그 또한 잠재워야 한다.

남는 것은 ‘숨’ 뿐.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이것을 지켜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저 걷는다.

그저 걸음만 남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의식은 (혹은 뇌는) 이것을 참아내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졸음이 온다.

혹은 온갖 생각에 빠져든다 -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졸음과 DMN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 미친 원숭이, 술 취한 코끼리.

그래서 초기의, 당분간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원숭이나 코끼리를 멈추는 노력.


그래서 유효하다.

<그저 앉기를 권함>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이 글을 통해 잠시라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조건적인 행복을 넘어 조건 없는 행복, 깃털처럼 가만히 내려앉는 행복의 순간은 언제였고 또 어땠는지,

다시 그런 순간에 가까워지는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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