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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희 Nov 07. 2024

후지산 없는 후지산 여행

이 여행 내가 만듭니다

 후지산이 보고 싶다.

 한 달 내내 딱히 근교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줄곧 생각해 오다가, 여행이 끝나갈 즘 갑자기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필 마지막 주는 줄곧 흐릴 예정이었다. 출국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초조해질테니 그냥 비가 오는 내일만 피하고, 내일모레 투어를 떠나자고 생각했다.

 도쿄가 메트로폴리탄이라는 건 다시 한번 도로에서 느꼈다. 2시간 정도 예상한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이 무색하게 우리는 3시간이 넘어서야 첫 번째 장소에 다다랐다. 가와구치코호수는 가장 유명한 후지산 스팟이다. 거기서 난 예감했다. 오늘 후지산은 못 보겠구나. 흐린 정도가 아니라 구름으로 꽉 차서 마치 후지산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원래 물이 있는 풍경은 날씨가 팔 할인데 말이다. ‘에이, 출발할 때는 오늘 80%는 보일 수 있을 거라 했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여행 일정표는 이랬다.

- 후지산이 보이는 호수/공원(가와구치코 호수/오이시 공원)

- 후지산이 보이는 신사(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

- 후지산이 보이는 또 다른 호수(야마나카코 호수)

 

 아, 10시간을 들였는데 후지산 없는 후지산 여행이라니. 통탄하다.


 두 번째 장소로 향하는 길, 가이드는 아라쿠라야마 산겐 공원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별로 신사의 아름다운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쳇 어차피 저렇게 안 보일 건데 뭐’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나도 모르게 훅 하고 올라와 놀랐다.

 

아라쿠라야마 산겐의 전망 포인트에 오르기 위해서는 끝없는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멋진 뷰를 보려면 준비운동을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해온 잦은 사찰여행을 통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헬스장에 있는 일명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스텝퍼에 오른 것처럼 엉덩이 근육이 얼얼할 정도로 계단을 올랐다.

 뷰 포인트에 도착해서 실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사진을 두 장 보냈다. 내가 찍은 사진과 후지산이 있는 아라쿠라야마 산겐.


내가 본 아라쿠라야마 산겐과 여행사이트가 제공하는 아라야마쿠라 산겐


 5분 후 카톡이 울렸다. 손 빠른 디자이너인 동생은 내가 찍은 아라쿠라야마 산겐 사진에 후지산과 인터넷의 멋진 후지산을 합성한 사진을 보냈다. “라희가 우울해하는 거 같아서 내가 한 번 만들어봤어”라고 했다. 그러더니 또 잠시 후에는 내 사진을 복붙하여 10명이 신사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사진을 하나 보냈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곤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앞으로 남은 일정 실망만 할 순 없다. 고작 구름 좀 끼었다고 도쿄에서 왕복 7시간을 들여서 온 이 여행을 망칠 순 없다!

 비장하게 가방을 열어 수첩을 하나 꺼냈다. 고슈인 수첩이다. ‘고슈인’은 일본 신사에서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종의 인증같은 거다. 신사마다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선 일종의 스탬프 투어같이 큰 유행을 끌었다. 사찰 같은 종교적인 관광지에도 리미티드 에디션 마케팅이라니, 얏빠리(역시나) 일본이다. 그래, 오늘 첫 고슈인을 획득해 보자.

  일본 신사에서 참배하는 법을 들은 적이 있다. 흐르는 물로 손과 입을 살짝 씻어낸 후(왼손-오른손-왼손-입), 신사 앞으로 향한다. 두 번 고개 숙여 절하고 두 번 소리 내 손뼉을 친 후에 소원을 말하면 된다. 근데 ‘~ 해주세요’가 아닌 ‘~ 하겠습니다’ 한다는 거다.


이렇게 주체적인 소원빌기는 처음이다.

 ‘남은 30대, 열심히 좋아하는 것에 정진하겠습니다’

 다짐을 하고 후지산과 합성된(?) 사진을 보니 다짐을 마음에 각인되는 느낌이 들었다. 후지산은 그 자리 그대로 있을 테니, 다음엔 제대로 보지 뭐.

야마나카코에서 내가 가진 먹이를 기다리는 백조와 돌아오는 투어보트. 아라쿠라야마산센겐 신사의 고슈인


  그렇게 맘먹고 나니, 다음 관광지에서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야마나카코 호수는 후지산이 보이는 호수로 유명하지만, 백조가 있는 호수로도 유명하다. 내가 또 어딜 가서 백조를 이렇게 가까이서볼까? 다른 사람들이 보트투어를 떠나기까지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줄었을 때 다시 한번 백조들에게 다가갔다. 처음으로 같이 있는 생명체다. 나는 이 아이가 어색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런데 사람이 익숙한거 같은 이 백조는 경계는커녕 내가 먹이를 들고 있지는 않은지 유심히 살펴볼 정도였다. 투어 버스의 사람들이 투어보트로 우르르 이동한 사이 백조와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후지산 여행에서 후지산이 안 보이면 내가 다른 여행으로 만들어버리면 되지. 이 여행은 이제부터 나의 첫 야마나시현(지명) 여행이다. 첫 고슈인을 획득한 여행이자, 30대 어른이의 다짐이 깃든 여행, 첫 백조와의 만남이 담긴 여행이다.


내 삶에 먹구름 가득 낀 날이 찾아오면, 이 후지산 없는 후지산 여행을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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