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한 달 있었으니 맛집 많이 알겠네?”
라고 묻는 친구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맛집도 다녔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생활을 해가는데 더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집 앞에 있는 고작 10석이 될까 말까 한 야키토리 집에만 거의 주 2회는 방문했다. 닭의 간, 심장, 껍질, 오리고기 등 내가 못 먹는 것 천지라 메뉴 제약도 아주 많은 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집에 가면 편했다.
D가 두 명의 할머니들과 운영하는 그 집은, 동네 사랑방 같았다. 모두가 들어올 때 D에게 이름을 붙여 인사했다. 할머니에게 주문할 때도 애칭을 부르는 게 기본이었다. 혼자 와서 저녁 겸 반주를 하고 있으면, 다른 동네 친구가 들어와서 사는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새로운 손님이 오면 D는 자연스럽게 “이 분은 자기 패션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예요.” 하고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럼 러닝클럽장이 “우리 러닝 클럽에 들어오시지 않겠냐”며 자연스럽게 명함을 주기도 했다. D는 종종 내가 소외되지 않도록 자기 친구들에게 “여기는 한국에서 온 친구예요”하고 은근히 말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나는 잔뜩 기대되는 표정으로 짧은 일본어를 섞어가며 얘기했다.
하루는 그 가게에서 ‘L’을 만났다. 캐나다나 영국에 가보고 싶어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마츠리에 갈 계획이라고 했더니, 선뜻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이 동네가 아직 낯선 여행자에게 훅 들어오는 친절함이 반가웠다. 도쿄에 고작 며칠 살면서 도쿄 사람들은 깍쟁이라고 선입견을 가지려는 나에게 “틀렸어”라는 경고음을 울렸다.
가게 휴무 전날 D는 자기도 일 끝나면 2차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가게 할머니는 물론 그 앞 다찌석에 있던 무리도 함께 가는 모양이다. 우리는 하타가야의 다른 바로 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한번 주인장과 통성명을 하고, D는 다시 한번 나를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해줬다. 한창 이야기할 때 한 무리가 가게에 들어왔는데, 내가 방금 전 길을 헤맬 때 나를 도와줬던 친구였다. 내가 반가워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오히려 궁금해했다.
나이와 직업을 다 떠나 동네로 하나 된 사람들이었다. 13살짜리 딸이 있는 아이 아빠부터 이제 도쿄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는 21살짜리 한국계 뉴질랜드인까지. 모두가 하나 되는 이런 커뮤니티를 본적이 언제였나 생각했다. 도쿄같이 큰 메가시티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런 곳을 알게 된 게 행운이었다. 서울에도 이런 커뮤니티가 있을까, 있다면 알고 싶었다.
도쿄에서 내가 의지할 곳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도쿄에 오면 나를 기억할까 하는 생각에 조금 설레려는 순간. D는 나에게 이 가게는 다음 달 문을 닫는다고 했다. 재개발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