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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 Dec 29. 2023

묵은지 100% 활용하기

겨울 추천 요리

겨울이 되면 식탁에 자주 올라오던 국이 있다. 묵은지 김치를 씻은 후 송송 썰어 멸치 육수에 토도독 밀어 넣고 된장 한 숟가락을 넣으면 되는 엄마표 묵은지 된장국. 찌개의 걸쭉함도, 육류 특유의 기름기도 없어서 데우지 않아도 뜨거운 밥에 말아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김치가 들어갔지만 빨갛지 않고, 된장국이지만 쉰 김치 풍미가 살아있는 오묘한 국이다. 김치가 덜 씻어지면 된장 김칫국이 되었다가, 된장이 많아지면 묵은지 된장국이 되는, 요리할 때마다 이름이 달라지지만 어떻게 먹어도 감칠맛이 나는 단연 엄마표 요리의 최고봉이라 뽑겠다.


엄마는 겨울맞이 새 김장을 하면 일 년간 먹고 남은 묵은지를 손질해 한번 끓일 분량으로 소분 후 냉동실에 넣어 둔다. 그렇게 먹다 보면 여름철에는 귀한 음식이 돼버린다. 어떤 해는 묵은지가 많이 없어서 먹고 싶어도 못 먹기도 하고, 어떤 해는 너무 많이 남은 묵은지 덕에 냉동실 한 칸을 차지하고도 남아서 매일같이 먹기도 했다.


지난 주말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제일 간단한 이 음식에 도전해 봤다. 그동안 매운 거를 못 먹는 아이가 있어서, 직장 생활로 바빠서, 집에서 음식을 잘 안 해 먹어서, 친정 근처에 살아서 참 여러 가지 핑계도 많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연두와 라면수프의 힘으로 요리를 하는 나에게 엄마의 맛을 낼 수 있을지, 요리고자 확인템이 하나 늘어날지는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게 아니었다. 


새로운 김장 김치의 등장과 함께 딤채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니, FIFO (first in first out)에 따라 제일 오래된 작년 김치가 주방 팬트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방치하니 하얀 골각지와 함께 푸우우욱 익은 묵은지가 되어 버렸다. 김치애가 투철한 나에게 김치를 버린다는 것은 넷플릭스 계정 차단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일이기에 신랑이 보기 전에 해치워야겠다. 여보, 막내제부 넷플릭스 계정이 더 이상 플레이가 안 돼요. 디즈니로 갈아탈 때가 되었어요.


김치에 대한 애정이 깊다고 손톱에 물드는 김치국물까지 참을 수 없다. 일단 니트릴 장갑을 착용하고, 김치 두 포기를 꺼내서 흐르는 물에 씻겨주니 48색 크레파스로는 표현이 안 되는 묵은지색상이 자태를 드러냈다. 얼마 만에 잡아보는 식칼이던가. 그래서인지 먹기 좋은 크기보다는 그냥 썰리는 크기로 잘라서 한알육수 두 알 넣고 끓인 물에 투하, 이제 내 손을 떠났다. 아니지! 된장이 남았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얼마나 넣어야 할지 모르기에 일단 한 숟가락 거하게 푸니 한 국자인가 보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끓기를 기다리는 일뿐, 간절한 마음으로 연두를 외면하고 싶다.

다 끓은 맛이 뭔가 부족하기에 까나리 액젓 한 스푼 넣자 내 입맛엔 완벽하다. 신랑과 갓 지은 밥과 함께 먹고 식당에서 파는 맛이라는 결혼 10년 만의 극찬을 들으며 나의 첫 묵은지 된장국은 성공적인 테이프 커팅을 해냈다. 그렇게 신랑과 둘이 3일 만에 한솥을 다 해치워 버리고 내 대표 요리가 되었다.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 또다시 한 솥 가득 끓이고 보니 엄마가 보고 싶다. 매번 엄마가 해주던 국을 먹으며 식당을 차리라고 정말 맛있다고 감동만 하던 딸이 이렇게 맛있게 엄마처럼 끓였다고 한 그릇 가득 담아 드리고 싶다.

엄마, 이제 내가 맛나게 끓여줄게
식은 국에 뜨거운 밥 말아먹으면 반찬이 따로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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