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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 Jan 02. 2024

2024년 우리 가족 주말 루틴은 뽑기다

먹고 자고 싸는 걸로 혼내지 않겠습니다.

아픈 아이덕에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2024년 첫날을 시작했다. 금요일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30일 함박눈은 참을 수 없어 눈 맞으며 눈사람 만들다 눈사람이 되고자 눈밭을 뒹굴었으니 결국 2023년 마지막 날 해열제를 먹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해 첫날 새벽부터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해서 시부모님과의 아침식사는 물 건너가 버렸다. 떡만둣국을 얻고자 냄비하나 들려 보낸 신랑은 어머님의 사랑을 두 보따리나 들고 왔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2024년 시작이다.

걸어서 3분거리 같은 단지 시댁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세 식구가 오붓하게 앉아서 늦은 아침을 먹는데 갑자기 오늘 아이에게 시달릴 일이 눈앞에 훤히 보인다. 일단 신랑과 급하게 식사 뒷정리를 하며 저 컨디션 안 좋은 아이와 오늘을 어떻게 잘 넘겨야 하나 고민하던 중, 번쩍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야! 이리 와봐!! 너도 이리 와봐!!!"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부르는 아내의 힘찬 소리에 긴장하는 신랑과 밥 먹고 종이접기 시작하려는 아이의 불만 가득한 모습이 보이지만 빨리빨리를 재촉한다. 일단 도착한 둘에게 메모지 장씩을 건네자 아이는 바로 종이접기를 시작하고 신랑은 영문을 몰라 쳐다보기만 한다. 종이 접으라고 준거 아니다.


"자 두장씩 받아. 여기 한 장에는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른 한 장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적어봐. 가족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와 신랑에게 무슨 펜이 좋은지 물어보며 다른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 그렇게 각자 펜 하나와 종이 두장을 들고 적어 내려가는데, 아 인간들이 분명히 두장에 각각이라고 했는데 신랑은 한 장을 좌, 우로 나눠서 쓰고는 다 썼다고 하고, 아이는 앞면에 하고 싶은 일을 적고 뒷면에 해야 할 일을 적기 시작한다.


자기 정말 그러기야?


하아... 내가 두장을 주며 뭐라고 했는지 나만 기억하나? 한 장에 다 쓸 거면 왜 두장을 주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야? 아니 도대체 이건 는 여자, 너넨 남자라서 그런 거야? 나는 정 씨, 너넨 김 씨라서 그런 거야? 아님 내가 말하는 거는 너넨 들리지가 않는 거니? 아침부터 혈압 오르지만 마음속으로 이너피스를 외치며 두장에 나눠 쓰라고 입꼬리만 웃으며 좋게 이야기를 한다.


다 적은 종이를 접고 접고 접고 접어 1/16 크기로 만들자 눈치 있는 신랑은 같이 접는다. 다 접은 후 일단 바닥에 냅다 던진다. 너네궁금해도물어보지내가대답해줘도맘대로들을거잖아그냥 "가위바위보!" 최종 승자는 아이였고 "바닥에 있는 거 하나 잡아서 펼치고 읽어!" 이 정도는 하겠지? 쉴 틈을 주면 안 된다.

어느 것이 걸릴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척척박사님!

아이가 뽑은 거는 아빠가 적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게 뭐라고 신랑의 얼굴에 만족감이 지? 그 모습에 왠지 뿌듯해지며 목소리가 조금은 나긋나긋해진다.

"자~ 하고 싶은 거를 먼저 뽑았네! 각자 하고 싶은 거 30분간 하기! 대신 이건 내가 하고 싶은 거를 적은 거니 서로 방해하지 말자."

신랑은 서재방 책상에, 아이와 나는 거실 책상에 각자 자리를 잡고 45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했다. 45분이 되면 종이접기를 더 하겠다고 할 것이 분명하니 40분 후에 알람을 맞추고 미리 알려 주는 친절함은 나를 위한 거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보다 15분을 더 주며 아이에게 너무 재미있게 하길래 특별히 15분을 더 했다는 생색도 불만 방지를 위해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다. 그렇게 45분이 되자 아이에게 아빠한테 시간 다 되었다고 나와서 다시 뽑자는 이야기 전달하는 미션을 줌으로써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계획은 정확히 통했다.


그렇게 뽑은 두 번째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아이는 해야 할 일은 30분만 하자는 신신당부를 하며 아빠와 분리수거와 우유를 사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난 보름간 건조기가 토해 놓은 옷거리산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30분 안에 끝내야 하기에 바쁘다, 바빠. 칼같이 30분 후에 집에 들어와 또 뽑기를 하자는 아이를 보니 내 즉흥적인 계획을 일회성으로 끝내면 안 될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뽑기 역시 해야 할 일이기에 실망한 아이에게 "너 해야 할 일에 밥 먹기 적었지? 배 안 고파? 밥 먹자! 밥 차려야 하니 숙제하고 있어." 또 성공! 그렇게 숙제를 하고 밥을 먹은 후, 아이가 규칙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해야 할 일이 3번 연속으로 나오면 3번째는 다시 뽑자는 네 의견은 사실 나도 바라는 바야.


네 번째로 뽑은 종이 역시 해야 할 일이었고 아이는 바로 다시 접으며 남은 두 개 중 아무거나 뽑아도 하고 싶은 일이라며 자기만 아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생색을 낸다. 초등학교 가더니 잘 배웠네 우쭈쭈 하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렇게 6장의 미션을 모두 실행하고 나니 어느새 8시 30분! 이제 씻고 자야 하는데 아이가 던진 말에 올해 주말 루틴으로  뽑기를 하려던 내 결심이 흔들렸으니...

엄마 나 안 자도 돼. 해야 할 일 다 했잖아.
아이의 해야 할 일 리스트. 잠자기와 밥 먹기가 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뭐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거라고 했지!"
앞으로 먹고 자고 싸는 걸로 안 혼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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