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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기도설 Apr 19. 2024

사과소주

- 지혜 설레다

조명 판을 양쪽에 세우고, 테이블 중앙에 두 개의 접시가 놓여 있다.

무늬없는 하얀색 테이블보가 깔려 있다. 그 앞으로 수강생 5명이 긴장한 듯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심 선생은 "이 선생, 접시 골라와요. 누가 먼저 접시부터 갖다 놓은 거야! 캐주얼하고, 단순미 있는 것으로, 컵도 골라오고". 지혜는 심 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촬영실을 벗어나 그릇장이 즐비한 작업실에 들어갔다.


지혜는 빌레로이앤보흐의 체크도트 무늬의 접시 한 개와 무늬 없는 연노란 접시, 투명한 고블렛 잔 두 개를 쟁반에 들고 나온다.


충무로 대한극장 뒷골목. 우성빌딩 3층 심선생의 스튜디오다.

광고계에서는 내로라하는 실력자이고, 아마도 TV를 켜서 나오는 광고의 음식 촬영은 거의 모두 심 선생이 진행한 거라고 보면 될 정도다.


지혜는 접시 중앙에 햄버거를 담고, 접시는 카메라를 보며 사선으로 배치한다. 심 선생은 "자 여기 이선생이 배치한 햄버거를 보세요. 양상추 살짝 삐져나와 있게 해서 초록색 생동감을 주고, 패티 위에 토마토가 약간 흘러내릴 듯, 치즈는 삼각형 모서리의 각을 세워주고요.

세 가지 색 대비를 느껴보시고, 빵을 덮을 때는 약간 삐딱하게 덮어 줍니다.


'먹는 음식'과 '찍어야 하는 음식'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좀 더 탐스럽고,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해야 할 거짓말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이게 포인트죠"


지혜는 테이블 옆에 있다가 심 선생의 사인을 받고 햄버거 위의 빵에 손을 대고 있다. "자, 햄버거를 해체해 봅니다. 보세요. 지금 햄버거 중앙에 무엇이 있죠" 테이블 주변으로 5명의 수강생이 앞으로 둘러선다.


"찍어서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세팅, 카메라 앵글 안에 배치가 중요해요." 지혜는 힘주어 말한다.
햄버거 중앙에 꽂힌 이쑤시개. 수강생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쑤시개라니" 술렁거린다.
지혜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거죠. 햄버거를 보면서 침샘이 자극되려면, 색깔과 재료가 보여야 합니다.
자연스러움은 기본이고요. 자 옆에서 이쑤시개 고정 없이 세팅해보시기를 바랍니다. 10분 휴식 후 작업실로 이동해서 고정 전, 고정 후 사진 촬영 개인별 진행하고, 여기로 40분 후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지혜는 회의실로 심 선생의 홍차를 들고 들어간다. 차를 한 모금 마실 때 핸드폰의 진동을 느낀다.
그이다. 그의 전화다. 심호흡 하고 받는다. "여보세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지혜는 답을 하지 못하고, "아, 네. 지금 원장님과 회의 중이어서요"

그는 "혜화역 나와서 어제 만난 곳 오른쪽에 낙산가든이 있어요. 그 앞에서 6시30분에 만나죠. " 눈주름이 많던 어제 그의 목소리보다는 조금 낮게 들린다.

"끊습니다." "네"가 동시에 들리고 지혜의 말이 들리기 전 전화는 끊겼다.




<반저> . 낙산가든 사이 골목, 모기업 연수원 앞에 점잖은 글씨체의 <반저>의 간판이 보인다.
그는  "요즘 레몬 소주다 해서 소주에 섞어 먹는 거 유행인 거 아세요? 

여기는 유일무이하게 과일이랑 소주랑 섞어서 마시는 집이에요. 수박 소주랑 사과 소주도 보세요." 수박 반 통을 테이블에 놓는다. 뚜껑용 수박을 들어내니 수박 통 안이 화채를 만들고 남은 것인 양 동동 떠있다.


동그란 수박 조각들과 얼음이 조금 있고, '저 물이 수박 물이 아닌, 소주란다.' 지혜는 처음 본 이 세팅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박 통 앞에는 수도꼭지 같은 것을 달아두었다.

<반저>의 수박 소주.


그는 지혜의 얼굴을 보고, 지혜는 애써 담담한 척 수박 통을 보았다가 이따금 그의 콧방울을 보았다.
그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합니다. 내가 미안하다는 건 어제 한 행동이 미안하다는 게 아닙니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만난 첫날, 당황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거고, 나랑 계속 만납시다." 지혜는 '놓치고 싶지 않다'를 되뇌며, 대답도 하지 않고 끄덕거리지도 않고, 수박 소주를 살짝 들이켠다.


수박 반 통의 소주가 동이 날 즈음 그이의 동생 이야기를 들었는데, 동생 상관없이 '나를 나로서만 만나고 싶다' 는 알듯 모를 듯한 그이의 목소리가 나즈막이 들린다.
동생이야기부터 꺼내는 그이의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지혜는 한 잔 남은 수박 소주를 마저 마신다. 


5동 앞, 지혜는 두 손으로 핸드백을 메고 걷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잠시 간격이 있는 사이 긴장감이 흐른다.
그는 지혜와 이십 센티쯤 간격을 두고 옆에 나란히 걷는다.


 "음, 내가 그저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보여야 할 것 같아요. 뽀뽀하고 싶지만 참으려고요."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것으로 합시다." 그는 아파트 후문으로 뛰어간다.

"지혜 씨 잘 들어가요."


지혜는 무언가 서운하다.

화채를 만들고 남은 빈 수박 통처럼, 수박 소주 옆 사과 소주처럼. 

상큼한 수박 소주의 향기는 아직 입안을 맴도는데 뛰어가는 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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