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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May 28. 2020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 아르코 미술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아르코 미술관, 2020.05.08-06.21. 남화연, 정은영, 제인 진 카이젠.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오랜만에 좋은 전시에 다녀왔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혼란했던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을 무렵,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개관하기 시작하는 미술관에 다녀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이태원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하여 또 다시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말입니다.


    좋았던 전시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꽤 긴 공백기 이후 첫 전시였던 만큼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전시장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영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과 몰입이 어렵지 않은 전시였습니다. 물론 ‘미술관’에 열린 전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견해를 고수하고 계신 분께는 꽤나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을 수 있습니다.

 

아르코 미술관 이번 전시 티켓.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하여 사전 예약을 받고 있으며, 안전한 관람을 위하여 마스크는 필수입니다!



    이번 전시는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열린 전시의 귀국전입니다. 간략하게 비엔날레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비엔날레는 2년에 한번씩 열리는 동시대 미술 축제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경우 미술 올림픽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그 역사가 길고,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시는 총감독이 직접 큐레이팅하는 국제전과 각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국가관 전시로 나눠 열립니다. 따라서 다양한 국가들의 다채로운 동시대 미술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2019년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경.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김현진 예술감독의 감독 하에 남화연, 정은영,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술감독부터 작가까지 모두가 서양의 타자인 동양, 그리고 남성의 타자였던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시의 제목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20세기 초중반, 격동의 역사 속에 놓인 여성 조선인 4세대의 서사를 담은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에서 빌려왔습니다. 제목은 한국관 전시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흔히 냉전, 전쟁, 식민,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남성들입니다. 여성, 혹은 고정된 성별 담론 속에서 포획되지 않는 이들도 역사의 거센 파도를 지나 살아 남았는데 말입니다. 전시의 문제 의식이 촉발된 지점은 바로 이곳입니다.




『Pachinko』 | 이민진 저 |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전시는 근대 주류 역사에 의하여 왜곡되고, 삭제되고, 멸시받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젠더와 전통’ 이라는 키워드로 구성합니다. 세 작가들은 동아시아의 근대화 역사에 젠더 의식을 비판적으로 개입하여 ‘정상성’의 규범에서 들리지 않던 타자들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젠더나 전통의 이슈는 동시대 시각 예술의 주된 동력이자, 서구 중심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좋은 무기이기도 하죠.  



 

   먼저 남화연 작가의 작품은〈반도의 무희〉는 메인 영상 1점과 서브 영상 4점으로 구성된 멀티 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입니다. 남화연 작가는 식민, 냉전, 근대화와 국가주의를 탈주하는 근대 여성 예술가 최승희의 춤과 삶을 재조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최승희는 춤은 기생들이나 추는 것으로 가치절하되던 시기 무용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무희였습니다. 그녀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을 위하여 일본군 위문 공연을 다니는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의 전통 무용을 연구하여 현대적인 동양의 발레를 만들고자 하였죠.  그러나 최승희는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1946년 월북하여 끝내 이상을 펼치는 못하였습니다. 남화연 작가는 최승희 개인의 역사와 반도의 역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반도'와 '무희'가 교차하는 지점을 사유하기를 촉발합니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 채널 비디오 설치, 가변크기



    제인 진 카이젠은 <이별의 공동체>라는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의 바리 설화와 덴마크의 입양아로 살아왔던 작가 개인의 서사를 교차시키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눈 여겨볼만한 점은 무당과 굿의 존재입니다. 무당은 굿을 통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명확한 경계로 나뉘어진 하늘과 땅을 연결합니다. 작가는 작품 자체를 하나의 굿 형태로 엮어내, ‘바리’와 같이 버려진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내고자 합니다. 두 경계를 이어주는 무당의 굿은 전 세대에 걸쳐 다양한 언어로 말하나 경계인으로 살아온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불러모은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제인 진 카이젠, 이별의 공동체,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프로젝션 이미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업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미학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정은영 작가의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여성 국극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해온 정은영은 여성 국극이라는 장르를 단순히 답습하거나 계승하기 보다는 현재를 재고하기 위한 매개로 사용합니다. 정은영은 <여성국극 브로젝트>를 통하여 1950년대 근대 국가의 욕망 속에서 태동하였으나, 쇠퇴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국극’이라는 특수한 장르를 분석하고, ‘성별 관념’ 그리고 ‘전통과 여가의식’에 드리운 억압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자 하였습니다.


    (여성 국극은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웹툰 ‘정년이’ 덕분에 젊은 층에서도 꽤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 국극은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과정 을 거치며 ‘전통’의 범주에서 배제되어, 국가 차원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며 쇠퇴하게 된 된 역사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정부는 성별의 이분법적 구분에 근거한 근대화를 추진중에 있었고, 당연히 ‘여성 국극’은 국가가 지정할만한 ‘전통’의 범주에 자리잡을 수 없었습니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다채널 영상, 스테레오, 5.1채널 서라운드, 가변설치



    여성국극의 특수성은 여성들이 극의 모든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성의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성’의 영역에 있습니다. 정은영은 여성 국극 속 남성성, 즉 사회적 통념에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 남성이나 동시에 그들은 기존의 ‘남성성’ 개념의 경계 안에 위치하지 않은 독자적인 성별에 주목합니다. 작가는 이 작업을 이 작업을 통하여 정상성의 범주 내에서 읽히는 젠더 개념에 의문을 던지고, ‘정상성’의 역학을 비판하고자 합니다. 이번 작업은 여성 국극을 통하여 정상성 개념에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한 여성 국극의 상상적 계보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다채널 영상, 스테레오, 5.1채널 서라운드, 가변설치



    작품의 제목인 ‘섬광, 잔상, 속도, 소음’은 비디오 아트에서 배제되는 요소들로, ‘좋은 영상’의 반대항에 있는 요소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은영 작가는 이 네 요소들을 영상 속에 그대로 녹여 내며 ‘좋은 영상’에 대한 믿음, 즉 ‘정상성’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네 명의 젊은 퍼포머들을 담아낸 영상작업 입니다.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다채널 영상, 스테레오, 5.1채널 서라운드, 가변설치


     화려한 금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속도감 있고 화려한 조명과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경쾌한 리듬과 함께 마지막 영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작품은 트랜스젠더 음악가 키라라, 레즈비언 배우 이리, 중증장애인이자 여성 배우인 서지원, 드랙킹 아장맨의 삶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장애인, 트렌스젠더, 남장 여성 배우 등 고정된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그들의 몸짓과 경쾌하고 빠른 음악은 제도 밖 존재하는 몸을 사유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움직임과 음악에 맞춰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도록 장려합니다.


    네 명의 젊은 퍼포머 가운데는 장애 여성인 서지원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띱니다. 작품은 서구의 퀴어 역사나 관습적인 서구 퀴어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아시아적 퀴어 이미지를 구축하고자는 동시에, '장애인'의 범주 까지 퀴어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하는 듯 합니다. 정은영은 퀴어함의 정치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서구의 관점에서 좀처럼 사유하기 어려운 퀴어의 상상적 계보를 여성 극과 네 명의 다양한 인물들을 통하여 담아냅니다.




    

    런던의 프리즈 아트 매거진은 이번 한국관 전시에 대하여 "자아와 사회에 대해 서양의 근대성이 제안한 것과 다른 이해를 제시하기 위한 의식과 제스처의 역사가 발굴된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정은영 작업에 참여했던 배우 이리의 말마따나 이들의 이야기는 기존 채제 내에서 "들리지 않았던 " 목소리들의 합일지도 모릅니다. 전시에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좀처럼 이해되거나 읽히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을 하기를, 기대해봅시다.





사진 출처

한국 건축 온라인 포털: https://www.c3korea.net/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공식 사이트: http://www.korean-pavilion.or.kr/19pavilion/kr/



* 동시대 예술 플랫폼 Artlecture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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