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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Jun 23. 2020

‘예술’이라는 거울로 "사회의 우울" 들여다보기.

서울대학교 미술관, <우울한가요>  전시 두 번째 이야기

<우울한가요, Are you depressed?>, 두 번째 이야기.

2020.05.08-2020.06.21

서울대학교 미술관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of art (MoA)



    코로나로 함께 어려움을 견디던 시기,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는 <우울한가요> 전시가 막을 내렸습니다. 전시 자체는 참 좋았고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었지만, 밖으로 나가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아쉬운 대로 글로 <우울한가요> 전시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 주제는 주로 개인의 우울을 다루는 작가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오늘은 “시대의 병”으로서의 우울함을 다룬 작업들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울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우울증 환자의 수는 75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집계된 환자만 75만 명이니, 마음의 감기처럼 찾아오는 우울을 홀로 삼키며 버텨내는 사람들까지 고려한다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훨씬 많은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미래인 20대, 30대의 우울증 환자의 증가세가 두드러져, 국가가 나서서 젊은 층의 우울증 문제를 해결하려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지난 글을 참조합니다. https://brunch.co.kr/@imsense/30)


 



    먼저 만나볼 작가는 바로, 나수민 작가입니다. 나수민 작가는 청년들의 우울을 덤덤한 어조로 작품에 담아냅니다.


    흔히 "청춘"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미디어는 “청년”을 푸르고, 설레는 이미지로 재현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나수민 작가는 “청춘”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청년세대의 문제에 대하여 들여다보고,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청년들의 군상을 보여줍니다.


나수민, <젊은 예술가의 초상>, 캔버스에 아크릴릭, 27.3 x 40.9cm , 2017. (일부)


     작가의 작품에서 청춘은 이전처럼 활기와 어울림으로 대변되지 않습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수민 작가가 바라보는 청춘이란,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가만히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젊음을 흘려보내는 청년의 일상입니다. 착잡한 심경으로 구인 게시판을 기웃거리거나 삼각김밥과 탄산음료로 끼니를 때우기 급급한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나수민, <젊음>, 캔버스에 유채, 45.5×53cm, 2019.


     나수민의 <젊음>을 보면, 전반적으로 화려한 형광 색감이 눈에 띕니다. 청춘의 색으로 분류될 법한 채도 높은 형광 핑크 물감이 작품 곳곳에 묻어납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은 우리의 쓸쓸하고, 우울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청년입니다. 나수민 작가는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지만, 이 조차도 쉽지 않은 청춘들을 주목합니다. 이십 대 후반인 필자 역시 공감되는 지점이 많아 그림 앞을 떠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벽을 따라 가만히 걷다 보면 노원희 작가의 회화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원희 작가는 한국의 근대 미술을 이끌어온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노원희 작가는 지난 40여 년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습니다.


     노원희 작가의 작품 속엔 한국 현대사의 잊히지 않는 착잡한 순간들이 알알이 담겨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난한 세월이 잿빛 그림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권력과 사회적 폭력에 의하여 억압받는 개인의 모습을 그리고, 고발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노원희, <사발면이 든 배낭>,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 90.9x116.7cm, 2016.


    <사발면이 든 배낭>, 그 제목만 들어도 우리가 공유하는 아픔이 떠오릅니다. 작가는 2016년 많은 이들에게 비통함을 안겨주었던 구의역 사고를 다룹니다. 작품 속에는 식사 시간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사발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젊은 노동자의 지친 모습과, 그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노원희, <말의 시작>,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 162x130cm, 2015.


    <말의 시작>에서는 발화할 수 없는, 1인 시위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언론, 특별 조사 위원회, 진상 규명… 캔버스 위 글자들은 희미하고, 읽히지 않습니다. 흔적만 남은 피켓을 들고, 소리를 치지만 있지만 관람객들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습니다. <말의 시작>은 고발의 언어가 사라진 이미지를 통하여 세월호 진상 규명을 외쳤지만,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공허한 외침의 기록을 담아냅니다.


    최전방에서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의 발전을 이끌어왔던 작가는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30년 전과 동일한, 여전한 불안이 서려 있습니다.




배형경, <T-12>, <T-14>, <T-16>, <T-17>, <T-10>, 청동, 2019.


     누워있는 조각. 웅크리고 있는 조각.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 그리고 두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는 조각… 마지막으로 만날 작업은 배형경 작가의 조각 작업입니다. 배형경 작가의 작업은 전시가 끝을 향할 무렵에야 만날 수 있습니다. 각 작품들은 이전의 작업들에 대한 기억을 잠시 미뤄두고, 눈 앞에 있는 작업에 온전히 빨려 들어갈 정도로 강렬한 우울과 무력함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바닥으로 녹아들어 가는 듯 힘 없이 누워있는 조각의 모습.


 “인체 조각”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관람자들은 위풍당당하게, 혹은 매혹적으로 서있는 고대 조각상들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배형경 작가의 조각은 무엇 하나 온전히 서 있는 작업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쳐 쓰러진 조각상들이 주를 이룹니다.



    배형경의 어두운 조각들은 특정한 사람을 떠올릴 만한 기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삭발을 하고 있고, 감정의 상태도, 성별도 모호합니다. 최소한 “인간”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교집합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존의 무게에 억눌려 있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개개의 조각이 명확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데도, 실존적인 고독, 절망, 분노, 갈등, 소외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한 마음도 듭니다. 아마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힘겹게 투쟁하고 있지만, 간신히 지탱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형경의 검고, 울퉁불퉁한 작업은 로댕의 작업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깔끔하고 세련된 미니멀리즘 조각이 유행하는 요즈음, 배형경 작가는 묵직하고 어두운 인체 조각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작업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우울과 무기력의 흔적을 가만히 만져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 되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현상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블루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인해 일상의 패턴이 깨지고, 장기간 집안에 머무는 것이 주 원인이라고 합니다. 밖에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미디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두려운 소식을 접하니 우울한 증상은 더욱이 심해지겠죠. 현재 코로나 블루는 개인의 병리보다는 사회적 심리현상으로 판정이 되고 있습니다.


Coronavirus blue depression, @LIZZIE KNOTT


    흥미롭게도 인제대 일산 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의 이승환 교수는 코로나 블루를 예방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취약한 계층을 돕는 것이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개개인의 우울감을 해소해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안정장치가 되어주기도 할 것입니다.


    타인의 우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시대의 우울감에 대하여 논하는 일 역시 불편한 일이죠. 그러나 소외된 이들의 우울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변화를 위한 귀한 한 발자국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가 지금의 시대에 한 번쯤 볼만 했던 전시가 아닐까 합니다.


    비록 전시는 끝이 났지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각각 타인의 우울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요. 작품으로 우울을 만나진 못해도, 직접 타인의 우울에 한 걸음 걸어 들어가 공감과 위로를 경험한다면 오히려 여러분의 우울이 한 뼘 더 가벼워 질지도 모르니까요.




*사진 참조


- 표지 사진:

http://www.khan.co.kr/allthatart/art_view.html?art_id=20200530140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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