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불안과 외로움의 시간을 보석처럼 여기기를,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17세, 이제 막 원하던 고등학교에 들어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해야 할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유학을 준비하기 위하여 자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걷지 않는 길을 과김히 걷기로 내린 것이죠. 아이를 지켜보는 제 마음을 편치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않는 삶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어머님은 아이가 현재 진로의 변곡점에 서 있는 듯하다며, 이후 외국 대학 진학 실패를 우려하여 저와의 한국 입시 수업도 지속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는 초반 며칠 동안 홀가분한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꾸역꾸역 듣던 온라인 수업도 듣지 않고, 억지스럽게 붙들고 있던 학교 과제로부터도 해방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친구와 함께 학교를 누비던 순간, 등굣길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과 학교 끝나고 먹던 떡볶이가 그리워질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서 축제라도 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함께 올린 사진들을 sns에서 마주하며 씁쓸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죠. 어머님은 진로 결정이 실패할 것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크신 듯하였지만, 실은 전 아이가 느낄 외로움이 가장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수업 갈 때마다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며 지내는지, 친구들 생각이 나진 않았는지, 진로 외에 관심 있는 일은 있는지 따위의 질문을 던지며, 아이가 읽어볼 만한 좋은 기사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바깥세상과 소통할 창구를 잃어버린 친구가 스마트폰을 유일한 소통창구로 삼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지금을 선택했습니다. '유학 준비'는 겉보기엔 화려해 보일지 모릅니다. 아파서 학교를 그만둔 것도 아니고, 반발심에 '때려치운'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앞으로 아이가 가야 할 길은 생각보다 더 캄캄하고 아득할 것입니다.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길고 고독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또래들과 키득거릴 때, 아이는 어학원에서 어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수업을 들게 될 것 입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올 때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하소연하기보단 나름대로 참아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또래집단과의 활발한 교류 연결보다, 집으로 찾아오는 선생님들과의 관계가 더 익숙하게 될 것이겠죠.
프리랜서로 살면서 어려웠던 순간은 '나를 증명하고 안심시켜줄 공동체나 직함이 없다는 사실'과 '누구도 나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마주할 때였습니다. 이때 갑작스럽게 미래가 캄캄하게 느껴지거나 불행에 대한 상상력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이 되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죠. 프리랜서로 산다는 것은 남들이 걸었던 길을 편안하게 가기보다, 확연한 방향 없는 길을 산책하듯 계속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보니, 이 아이의 선택이 조금 우려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불안을 잠재워줄 만한 장치들 없이 지내보며, '남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져올 불안의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명해줄 공동체가 없는 상태에서 불안한 미래를 홀로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지난할 것이고, 이 불안에 대하여 생각 없이 뱉어낼 동료가 없는 상태도 꽤나 고독할 것입니다. 그래서 매번 아이가 외국 대학 입시에 성공하든, 혹은 그렇지 못하든, 아이가 지나온 이 답답한 시간들이 앞으로 아이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에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선수로 꼽히는 이승엽 선수의 말마따나 "잘되고 안 되고는 모든 게 끝났을 때 알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이 지난한 일상이 아이에게 양분이 되어 연주자로서의 깊이를 더하여 준다면,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아우를 수 있는 연주자가 되는 초석이 된다면, 이 어둠의 골짜기는 반짝이는 빛으로 향하는 터널이 되어 줄 테니까요. 합격의 기쁨은 한순간이겠지만, 그때까지 아이는 매일을 살아내야 할 것 입다. 그리고 저는 걸음을 힘껏 응원하고 싶습니다. 지금 느끼는 불안은 타인의 불안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의 깊이가 되어줄 것이고, 마주할 고독은 조금 더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두터운 외투가 되어줄 것이라며 말입니다. 무엇보다,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저 자신을 바라보고,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로 지금의 저를 함께 다독이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