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을 건설 현장에 계셨던 아버지의 삶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여유로운 주말 오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예술의 전당에서 19세기 후기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하는 그림이 그려지진 않나요? 번쩍이며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고려청자'나 관광객들에게 둘러 쌓여 플래시 라이트 세례를 받는 '비너스 조각상'은 어떤가요?
우리는 흔히 "예술"이라고 하면,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예술이 오랫동안 그 고상한 지위를 지켜온 방식이기도 하죠.
오늘은 예술이랑은 거리가 먼, '예술이라 불러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을 촉발하는 전시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광화문 광장이 가장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이 들던 때,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을지로 공업소 장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개최했습니다. 딱 1년 전, 배달의 민족에서는 '을지로'라는 공간에 주목하여 '을지로체'를 제작하고 을지로의 시그니처 간판들을 주제로 한 소규모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을지로체⟫ 전시에 감명을 받은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작가 M.J. KIM과 함께 을지로 사장님들을 다룬 전시를 마련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무어라 평을 내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이번 전시가 올해 잊기 어려운 감동적인 전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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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예술이 될 때.
을지로 사진전. ⟪어이, 주물씨. 왜, 목형씨⟫
세종문화회관. 2020.10.24-2020.11.02
전시장에는 짧게는 이십 년, 길게는 사오십 년을 을지로에서 살아낸 '을지로의 사장님'들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셀럽도, 정치인도, 스포츠 스타들도 아니지만, 그들이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남겨진 장소를 담아낸 사진들은 그 나름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아이폰 카메라로는 그 아우라를 다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내내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공업사 사장님들의 초상 사진들은 마치 한 편의 위인들 전을 보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을지로는 '서울'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빛이 바래고 낡은 서울의 조각들을 품은 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네입니다. 을지로의 풍경은 내가 살아왔고 자부하던 서울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곳엔 시간의 흐름을 직격으로 받은 듯 낡고 남루한 건물들이 즐비합니다. 을지로는 ‘보여주기’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생활의 공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사진작가 M.J Kim은 이 지난한 생의 자취가 그대로 담겨있는 사람과 공간을 예술공간으로 초대했습니다.
전시의 말미에는 각 사장님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집이 관람객들을 기다립니다. 사진으로 미처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언어로 전달하고자 기획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곳에서 말로 이루어진 사장님들의 인터뷰 내용은 활자가 되어 관람객들의 시선과 마주합니다.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책을 한 권 집어 에코백에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아마 전시를 기획한 이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하게 그 나름의 삶을 살아온 자들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고상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예술은 배운 자들만의 전유물이자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삶만, 특별한 작품만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내는 흔적 그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매 순간은 그렇게 반짝이거나 미적이지 않습니다. 되려 때론 거칠고 때론 혹독하고, 때론 찌질하기도 합니다. 그 지난한 집합체들이 예술이 될 때, 우린느 곧 "삶=예술"이라는 공식을 성사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번 전시는 우리가 '구질구질'하다고 여겼던 아주 일상적인 노동의 한 현장을 예술로 승화하였습니다. 더불어 예술이란 인생에서 사치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예술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의 삶과 노동을을 예술의 영역에 포섭하고, 예술 그 자체로 만들었죠.
전시를 글로 옮기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전시를 보는 내내 경이로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애틋하게 여기는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쓰기를 시도하다가 곧 멈췄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록하고,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죠. 내년에는 어떤 새로운 시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내년 가을을 기다릴 이유가 생겨 마음 한 구석에 행복감이 퍼져옵니다.
전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저의 아버지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는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지금 저의 어머니를 만났고, 평생을 현장에서 살아가며 세 남매를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추운 겨울 주말이면, 아버지는 건설현장 파카를 입고 늦은 밤까지 귀가하지 않는 딸을 데리러 오시곤 하셨습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현장에 나갔다가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숙소에서 바로 잠이 드시는 생활을 반복하며 말이죠. 아버지는 늘 현장의 아저씨들과 생활하다 보니 거친 어휘들과 아재 냄새가 몸에 배어있으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딸에게는 서투른 표현으로 한없이 잘해주고 싶어 하셨죠.
대학원에 있던 시절 아버지는 자주 '예술학을 전공해서 뭐해먹고 사냐' 물으셨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체조를 하고, 현장을 감독하고, 퇴근하면 피곤한 상태로 티브이를 보다가 주무시는 아버지에게 예술은 삶과는 관련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겠죠. 가끔 있는 시위 때면 '단결투쟁' 옷을 입으시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야외에서 짜장면을 드시던 아버지는 '예술'이라는 단어와 참 어울리지 않으시는 분이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삶이 예술이라면, 그래서 아름답지 않더라도 찌질하고 갑갑한 것들까지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한 평생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딸들이 석사까지 마칠 수 있도록 살아온 아버지의 삶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딸들의 학력이 높아지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대화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도, 세련된 딸들에게는 멋없는 아버지가 되어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때론 치졸하고 찌질하게 지난한 일상을 반복해야 했어도, 저에게 아버지의 삶은 여전히 반짝입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