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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Aug 14. 2023

우울증에 도움이 된 사람들

우울증으로 약물치료를 받았던 기간은 대학원생이었던 20대 중반의 약 1년이다.


그 시기를 잘 버틸 수 있게 도움이 되어준 사람들을 꼽으라면, 맨 먼저 나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상태가 나빠져 지도교수님께 면담을 요청하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걱정과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겉보기에 부족함이 없고 심지어 행복해 보였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극단적인 선택에 다다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반드시 적절한 치료를 받고 푹 쉬라는 선생님의 답변은 당시 부모님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기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었다.


선생님이나 상사처럼 매일의 일과에 크게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건네는 위로는 큰 힘이 된다. 그날 선생님이 내게 보내준 응답은 단순히 개인 사정이나 편의를 봐주겠다는 배려가 아니라,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제자가 지금 당면한 문제에 꺾이지 않도록 무엇보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당부였다.


그리고 친구들이 있었다. 처방전과 상담이 필요한 일들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언제든지 서로에게 나눌 수 있는 불안과 혼란이 마음속에 샘솟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은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로 도움이 되었다. 썰렁한 학교 건물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과제를 하기도 하고, 밤새 술집과 클럽을 전전하다가 이튿날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머리카락에 찌들어있는 남들의 담배 냄새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고, 지구 반대편에 있으면서도 일기처럼 무엇을 봤고 무엇을 들었고 무슨 미친 짓을 했는지 등을 서로 소상히 보고하기도 했다. 너무나 무거워서 또는 너무나 자질구레해서 아무에게나 쉽사리 뻥끗할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을 때면, 모르는 새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던 긴장과 불안이 잠시나마 흩어지며 자취를 감추곤 했다.


종종 우리는 객관적이고 냉철한 어른으로서 서로의 상황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고 분석해주기도 하고, 가깝거나 먼 미래에 떼돈을 벌거나 멋진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돈과 사랑은 없어도 최소한 의미 있다고 믿는 어떤 일들을 해낸다면 지금 같은 젊은 날의 방황과 설움이 모조리 씻겨나갈 것처럼 현재를 보상할 미래에 대해 떠들기도 하고, 그래서 나름의 의미 있는 결론들과 함께 잠시나마 정신을 차리고 각자의 일상에 돌아갔다가, 얼마 뒤 다시 죽은 해파리처럼 넋을 잃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처럼, 내 학업이나 사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엉망진창이었으면서도 남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이성적이고 쓸모 있는 말을 해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자살 충동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시절의 나에게도 자기 상황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친구들은 이상하리만큼 많았다.


그래도 그 시기를 빠져나가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존재는 가족, 정확히는 부모님이었다.


우리 가족은 본래 대화가 많았다. 지금도 시끄러울 정도로 많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로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칸막이를 두고 나뉘어 있다면, 나는 말하는 칸의 대부분을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우울제를 먹게 된 사실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일 때문에 도리어 심각한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듬해에 휴학을 하고 본가로 돌아갔다. 잘 먹고 잘 쉬기로 했다. 그렇게 부모님 곁에 머무르는 동안, 어느 날은 그 말할 수 있는 칸의 맨 깊숙한 곳에 있던 문제들 중 하나가 불쑥 목구멍 밖으로 새어 나온 적이 있었다. 한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건넌방에서 모른 체 가만히 듣고 있었던 아버지가 딱 한 가지 충고를 던졌는데, 그것은 미움을 버리라는 말이었다.


그 단순한 말이 이후에 그 문제를 벗어나는 데 정말로 도움을 주었다. 충분히 미워할 대로 미워했기 때문에 그런 조언이 피부로 와닿는 시점이기도 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남을 원망하면서 나 혼자 그 상황에 갇혀 있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또 한편으로는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의 인생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녀로서, 아버지야말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용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말은 더욱 진실되게 느껴졌다.


또 하루는 좁은 이부자리에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서, 깜깜한 방의 어슴푸레한 창문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늘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곤 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내게 지금 힘든 일을 종이에 몽땅 적고 옥상에 가서 불태워보면 어떻겠냐는 다정한 제안을 했다. 어떤 내용인지는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면서. 늦은 밤에 차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거절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이미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마음에 얹혀 있던 짐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그 순간들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준 이유는 그런 말을 건네준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님이었기 때문이다. 삶을 미워하고 증오할 기회도, 감사하며 소중하게 여길 기회도, 그 멀고도 가까운 대척점을 갈팡질팡 오고 가며 이런 미련하고 가엾은 인간이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할 기회도 전부 부모님으로부터 왔다. 이해받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을 때는 서러웠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전함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구덩이가 조금씩 메워졌다. 그 자리가 움푹 꺼져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은 달랐다. 우리 가족이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서로 사랑해도 상처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기피의 대상이었다. 또다시 누군가의 가족이 되어 슬픔과 원망을 주고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막연한 두려움도, 비관적인 태도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점차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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