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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어느 도서관 사서의 고백

by 이상민 NIRVANA


유선은 세상엔 참 재미있는 사람도 많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선배 언니의 소개로 받아 교제를 시작한 재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재준은 복학생으로 내년이면 졸업을 합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 삼아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고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말을 빌리면 정작 사서라는 자리는 편하게 책을 볼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래도 반납한 도서들을 정리하면서 틈틈히 독서를 해요."라고 말하며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게 웃습니다.
4개월 남짓 그를 만나면서 느끼는 거지만 순수한 면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일터가 도서관인 관계로 두 사람의 데이트는
언제나 학교와 도서관, 그리고 구내식당과 근처의 벤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유선은 그와의 데이트에 큰 불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신과 시간을 보낼 때는 언제나 작은 배려까지 아끼는 그이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유선은 재준에게 끌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재준은 싱거운 농담을 잘하는 남자입니다.
어떤 때는 분위가 썰렁해질 정도로 말도 안되는 유머를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유선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가 그 유머를 들려주기 위해 잘 하지도 못하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외워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싹트고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그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재준은 예의 싱거운 미소와 함께 정말 중요한 선물이라면서 유선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제목은 황당하게도 <당구입문>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책을 선물했다. 이번엔 단테의 <신곡>이었습니다.
책선물은 이틀에 한권씩 계속 이어졌습니다.
목요일엔 <은비령>을, 토요일엔 헤르만 헤세의 <나비>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엔 <의학개론>을 선물했습니다.
일관성이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선이 물었습니다.

"이 책들은 다 뭐예요?"

그러자 재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습니다.

"내 마음이요."

유선은 아무 말 없이 책을 받아갔습니다. 그날은 <전태일 평전>이었습니다.

며칠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재준은 또 다시 책을 선물했다. <부자가 되는 법>
급기야 유선은 갑자기 짜증이 났습니다.
마음이라며 주는 선물들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마음이라면 사랑에 관한 연시나 연애 소설, 감성적인 에세이, 대충 그런 부류의 책들이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준은 다음날에도 엉뚱한 책을 선물했습니다.
바로 <임진록>이었습니다.
결국 그 일로 유선은 재준에게 심한 말을 하고 며칠 간 만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유선은 친구로부터 다른 남자를 소개받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재준과는 많이 다른 남자였습니다.
좀더 세련되고, 인물도 좋고 번듯한 직장까지 다니는 소위 엘리트였습니다.
재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까.
유선은 새로운 남자와 교제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재준을 찾아갔습니다.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천진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유선의 손에는 여전히 재준의 책선물이 있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선물이에요."라는 재준의 말과 함께.
<니힐리즘>과 <다다이즘>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유선은 자신과 상관없는 미술 서적과 철학 서적을 보자,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습니다.
재준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책들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유선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준에게 받아온 2권의 책을 책상위의 책꽂이에 아무생각없이 꽂아넣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참 많이도 받았네."라며 그동안 받은 책들을 천천히 둘러봤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봤을까요?

유선은 자기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무심코 바라본, 재준에게서 받은 책들의 제목의 앞글자를 읽게 된 겁니다. 그 글자들을 연이어서 읽으면 다음의 문장이 완성됩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유선은 친구한테 소개를 받은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자신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통화를 끝낸 유선은 밤이 새도록 재준에게서 받은 책들을 하나 하나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자신과는 상관없는 내용들이었지만 재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책을 읽어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재준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직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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