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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그가 남기고 간 편지

by 이상민 NIRVANA

그해 여름, 은경은 그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두 해 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자신에게 물려준 집이었지만 이제야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그가 폐암 말기라는 병원의 진단이 나왔을 때 은경은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그녀를 거부했었습니다.
나에겐 이제 미래가 없다, 그러니 날 떠나라고.
그러나 은경이 쉽게 물러나지 않자 그는 온갖 욕설과 거친 행동을 일삼아 결국 그녀가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은경은 너무나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곁에 남아있을 힘이 없었던 겁니다.
은경은 그를 잊기 위해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었습니다.
3년이란 시간을 보낸 후 그녀가 돌아왔을 땐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은경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집을 남겼다고 했을 때 처음엔 오고 싶지 않아 다른 이에게 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거의 두 달이 넘도록 선뜻 결정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앨범을 뒤적이다가 미처 치우지 못한 그의 낡은 사진을 보는 순간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말았습니다.
은경은 그의 체취가 남아있을 집에 한번쯤은 가고 싶었습니다.
집을 둘러보던 은경은 유독 한쪽 담벼락에 비를 맞지 않도록 길게 차양이 지붕을 형성하여 달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은경은 인부를 불러 그 차양들을 모두 떼어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으로 이사 온지 일주일쯤 지나서였습니다.
그날은 비가 유난히도 많이 쏟아지는 날이었습니다.
비를 싫어하는 은경이기에 하루 온종일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날이 개어서야 현관문을 나왔습니다.
그녀의 눈에 차양을 떼어낸 담벼락에 심한 얼룩이 생긴 것이 보였죠.
은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담벼락의 상태를 살피러 갔습니다.
수성 페인트를 썼는지 간밤에 내린 비에 대부분이 씻겨 내려 가버려서 보기 흉한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룩이 번진 사이로 무언가 보였습니다.
의아해진 그녀는 남은 페인트를 지워갔습니다.
그리고 모두 지웠을 때,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왜 그 담벼락에만 차양이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담벼락에는 그가 은경에게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로 글을 쓴 후에 다시 위에 수성 페인트를 살짝 입혔던 겁니다.
넓은 담벼락을 빽빽하게 채운 그의 편지.


'사랑하는…'으로 시작해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 라는 말로 끝을 맺는.



그녀는 외출을 취소하고 하루종일 그가 남긴 편지를 일고 또 읽었습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원망을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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