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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최초라는 단어의 마법

by 이상민 NIRVANA


그를 안 것은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지인들은 ‘시인 형’이라 불렀습니다.
시인 형은 늘 술자리에서 흥이 겨우면 즉석에서 즉흥시를 지어 낭송을 할 만큼 보기 드문 로맨티스트였습니다. 마치, 영화[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로베르토 베니니를 연상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연인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에 비해 그녀는 학벌도 좋고 집안도 빵빵한 소위 엘리트로 시쳇말로 금수저에 퀸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은 듯했지만 당사자들은 너무나 애틋하고 서로 없이는 못살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내 호기심을 억제하기 힘들었기에 술자리에서 그 누나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시인 형에게 빠져든 이유가 무엇이냐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누나가 대학원을 잠시 휴학하고 부모님이 마련해준 돈으로 카페를 운영하던 때라고 합니다.
카페를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근 석 달을 매일 찾아왔답니다. 매일 밤 영업이 거의 끝날 무렵, 카페에 들어 선 시인 형은 주문은 하지 않고 그냥 냉수만 얻어 마셨답니다.
허름한 사파리에 군복바지, 그리고 낡은 워커,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도수 높은 뿔테안경.
1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시인 형의 패션이었습니다.
독특한 그의 패션에 호기심이 생긴 누나는 시인 형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시인 형은 형대로 누나의 화려한 미모에 끌려,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아주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때론 그의 장기인 詩도 낭송하고, 워낙 낭만적인 사람이라 누나에게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나 또한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자상한 배려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명적인 바로 그날 밤.
그 날도 두 사람은 가게 문을 닫고 평소처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늦은 시각이 되서야 가게를 나섰다고 합니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라나.
문득 누나가 시인 형에게 물었답니다.

"왜 나에게 그렇게 잘해줘요? 음, 날 어떻게 생각해요?"

질문을 받는 형은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게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까지 누구 앞에서 춤이란 것을 춰본 적이 없거든. 내가 워낙에 그쪽으론 소질이 없어서 말이지. 하지만 난 네가 원한다면 춤을 보여줄 수가 있어, 이렇게……."


그러면서 시인 형은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눈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답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춤이었지만, 그녀에겐 세상 그 어떤 무용수보다 훌륭한 춤이었던 모양입니다
형이 그랬답니다.
그저 당신이 내게는 '최초'라고. 그게 무엇이든.
다른 이유따위는 없다고.
그때, 누나는 내리는 눈만큼이나 함박웃음으로 답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대답, 잘 들었어요.' 라는 의미로.


그때부터였다고 합니다.
누나가 그 형에게 마음을 완전히 준 것이.
단지 '최초'라는 단어가 지닌 마법에 이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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