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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Sep 07. 2020

대파 갖고도 싸우는 신혼

그놈의 대파

 4월 29일 토요일, 결혼 D+141



 자랑은 아니지만 지인들에게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싸움 이야기’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파 사건’이다.


 때는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2016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결혼 전, 지금 사는 집보다 더 조그맣고 부엌과 방이 분리가 되지 않았지만 원룸 치고는 나름 널따란 내 방이 싸움터였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나기 때문이다.




 감기였나, 뭔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하루 종일 집에 누워 있었다. 그날은 같이 장을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내 상태가 워낙 별로였던 탓에 호떡이 장을 혼자 보러 가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가 샀어야 했던 것은 몇 가지 자질구레한 식재가 전부였고, 리스트에는 대파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대파라는 채소는 실제론 1.5인 가구 정도의 규모였던 우리에게는 정말 딱 한 뿌리 정도 필요한 것이었고, 대형 마트나 편의점 같은 곳에서 잘 다듬어진 대파를 비닐 팩에 딱 한 뿌리씩 팔기에 그것을 사 오면 되겠거니 했다. 물론 말도 했다. 호떡, 파는 그 씻어서 파는 그 소포장된 걸 사 오면 돼! 분명히 말했다.


 누워서 한참을 기다렸다. 가짓수가 많지 않으니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보로 왕복 20분 남짓 되는 마트에 다녀오는 호떡은 생각보다 늦게 귀가를 했다. 손에 까만 봉지를 들고 장을 다 봐왔다며 내려놓는데 눈을 의심하고 싶은 것이 존재감 넘치게 등장하고 만 것이다. 파워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한 대파 무더기에 아픈 몸이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이거 왜 사 왔어?”

 “소포장된 게 없었어. 근데 이거 엄청 싸. 그래서 그냥 이걸로 샀어.”


 아니 당연히 쌌겠지…….

 규모의 경제라는 게 그런 거야. 네가 240 밀리리터짜리 콜라 한 캔 사는 것보다 1.5 리터짜리 사는 게 원래 싼 법이라고! 싸서 사 온 것까진 알겠어. 이것밖에 없었으면 사 오질 말았어야지! 왜 전화 안 했어? 전화 한 통이면 내가 사 오지 말라고 말했을 거고, 그럼 안 사 오고 끝났으면 될 일이잖아. 당장 대파 없어서 죽는 것도 아니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몇 마디 쏘아붙였더니 몹시 억울한 표정이 된다.


 “내가 전화 못 한 건 그래 내가 놓쳤어. 근데 나도 너 아파서 혼자 가기 싫은 장 보러 억지로 나가서 열심히 장 봐오느라 전화 깜박했어. 그게 그렇게 죽일 듯이 화낼 일이야?”

 “아니 이거 봐봐. 이 흙 묻은 거 다 누가 처리할 거냐고. 네가 할 거야?”


 대답을 안 또는 못하는 호떡과 아픈 와중에도 화는 내야만 할 것 같은 나의 마음이 부딪쳤었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시원하게 싸웠었고, 결국 그 흙 묻은 대파는 며칠간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탓에 꽃까지 피워냈었더랬다.

 이 일은 ‘대파 사건’으로 명명되어 사내 메신저를 타고 나의 친애하는 동기들에게 공유되었고, 깔깔거리던 동기들에게 하다 하다 대파 갖고 싸우냐고 한 소리를 듣고, 꽃이 피어버린 파를 눈물 흘리며 손질해 냉동고에 집어넣음으로써 ‘대파 사건’과는 영원히 작별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놈의 대파가 또 한 번 싸움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얼려둔 대파를 한참이나 맛없게 해동해먹으면서 다시는 이런 거 사지 말자고 몇 번이고 말했었는데, 혼자 부엌에서 눈물 쏙 빼가며 대파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물에 씻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마트에 가서 식료품 쇼핑을 하던 호떡이 대파가 천 원이라 너무 싸서 한 단을 또 들고 와버린 것이었다! ‘대파 사건’이 발발하던 첫날 쏘아댔던 대사의 8할쯤을 재활용했다. 전화 하지 왜 안 했어? 이거 다 누가 손질할 건데? 넌 어떻게 그 대파 사건을 잊을 수가 있어? 난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때 그 파 다 누가 손질했는지 기억은 나니? 그거 다 내가 했어!

 몇 마디 호기롭게 응수하던 호떡은 몇 마디를 넘기자마자 분노의 끓는점에 도달해 폭발해버렸다.  별 걸 갖고 다 난리라며 방의 불을 다 꺼버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 주체가 잘 안 되면 안 하던 살림을 하며 울분을 토해내는 버릇이 있는 나는 쌓인 설거지거리를 수세미로 닦아내며 펑펑 울었고, 울면서 설거지하는 내가 짜증 났던지 기어이 옆에 와서 또 뭐라고 날 선 말을 퍼부어댔다.


 ‘대파 사건 2’의 결말은 어땠더라. 그것까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대파 사건 2’에서 대파 한 단을 눈물 콧물 빼가며 손질해다 냉동고에 넣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것이다. 


 뜻밖의 ‘대파 사건’ 시리즈를 겪으며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파를 사자마자 손질해 물기를 닦아내어 냉동고에 넣어두면 꽤 오랫동안 그럴듯한 대파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거든. 지금이야 대파 한 단 사 오면 후다닥 손질해 냉동고에 같이 착착 넣어두며 살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 대파 사건을 통한 성장이 아예 없진 않았다.

 대파 사건 1, 2 동안 눈물 흘리며 파를 다듬던 그날의 억울한 눈물만은 잊지 못하겠지. 대파는 애먼 놈이 사 오고 손질은 엉뚱한 사람이 하는 일은 정말이지 억울해서 죽을 것 같은 일이다. 다시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대파 사건을 생각하는 내 몸에서 채혈이라도 한다면 피에서 대파 냄새가 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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