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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Sep 16. 2020

말에 라벨 붙이는 사람

오늘 들은 말들은 어떤 폴더에 저장할까

 “수업 듣기 전부터도 잘 쓰셨으니까-, 그럼 이 말이 귀에 들어왔나요?”


 한 번 더 듣게 된 글쓰기 수업의 끝 무렵, 경력직 수강생인 내가 써올 글을 기대하시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치다 이 말을 들었다. 부담을 중화시키는 칭찬과 함께 과제를 풀 열쇠까지 쥐여주시다니 과연 선생님이셨다.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물을 먹는다 하여 반드시 삼키지는 않아도 된다던 어느 책 속 문장을 떠올려냈다. 나 역시 그 책의 저자에게 배운 제자다웠다. 들리는 말 또한 그런 걸까, 들린 말 중 나의 의지로 귀에 들어 올 말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못할 듯했다.


 나쁜 말들은 흘려듣고, 좋은 말들은 꼼꼼히 되새김질하려고 하지만 좋게 들어온 말들이라 하여 모두 다 기억해낼 수도 없고, 듣기 싫었던 말들이라도 기억에서 빨리 몰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심리적 고막을 뚫는 말인가가 중요하고, 그렇게 귀에 들어온 말들은 내 뇌세포들에까지 저장돼버리는 것이다. 다만 이리저리 흐르다 이런저런 폴더를 나의 의지로 만들 뿐이다. 좋음과 나쁨보단 조금 더 세세한 라벨이 달린다. 뿌듯함, 수치스러움, 대견함, 애틋함, 설렘, 잔인함, 짜증남, 비참함, 막막함.......


 회사에서 모시는 상사 중에 ‘에어커튼’이라는 상사가 있다. 폭언을 하는 건 아니지만 마트 야채 코너에서 냉기가 내려오는 듯한 화법의 소유자라 내가 몰래 붙인 별명이다. 몇 주 전 에어커튼 부장님과의 면담에서 부장님은 내가 올 상반기를 날려먹었다고 했다. 듣자마자 기분이 훅 꺾이는 걸 느꼈는데 심리적 고막에서 튕겨내지 못했고, 이내 귀에 들어와 짜증남과 비참함 폴더에 나누어 저장됐다.

 지지난 주에 만난 엄마는 집밥을 맛있게 차려주시고서는 가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족스러움’을 보이지 않는 내게 소소하고 구구절절한 타박을 했다. 일 년에 우리는 고작 서너 번밖에 못 본다, 그렇게 삼사십 년 더 살아봐야 앞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백여 번 정도밖에 안 될 거라고 했다. 그 백여 번 중에 엄마가 멀쩡한 정신으로 우리를 만날 수 있는 횟수는 반쯤 될 테니, 한 번 한 번 만나는 가족과의 시간이 그만큼 귀한 거라고.
 그날 엄마의 말은 당일엔 ‘우리 엄마 왜 저래’ 폴더에 저장됐지만 며칠 후엔 ‘슬픔’ 폴더에도 복사됐다. 재작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죽음’을 부쩍 선명히 받아들이게 된 엄마가 나를 만날 때마다 서글픈 뺄셈을 하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에라도 죽을 수야 있겠지만 적당히 살다 가더라도 앞으로 내 귀엔 수억 마디의 말들이 지나갈 것이다. 씻어내고 싶어도 씻기지 않는 문장들이 있을 것이고, 기억해두려 저장해둔 따뜻한 말들도 세월의 풍파에 조금씩은 그 선명한 말끝이 마모될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이 쌓여 기억의 용량을 초과하게 되면 나쁘고 우울한 폴더 속 말부터 삭제될 수 있기를 소박하게 바라볼 뿐이다.


 ’수업 듣기 전부터도 잘 쓰셨으니까-’

 지난주 그 말은 뿌듯함 폴더에 넣었다. 고단한 하루 끝에 글쓰기 수업까지 들으러 왔다가 귀가하는 내 발걸음에 조금의 위로를 얹고 싶어서였다.


 토요일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주말은 늘 그렇듯 있던 줄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지나갈 것이다. 다음 주에 내 귀에 들어올 말들은 어떤 라벨이 달린 폴더로 가게 될까,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그저 이 글이 읽히는 날에도 뿌듯함 폴더에 몇 마디 더 얹어갈 수 있기를, 약간은 건방지고 조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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