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헛헛함
올해 서른셋, 서른넷이 인중 2센티 앞으로 다가와 있지만 만 32세이니 조금 덜 늙어본 척해본다. 오늘 오후엔 전화를 받았다. 02 어쩌구로 시작하는 번호는 못 보던 번호여서 받기 전에 조금 주저했지만, 일거리와 관련한 무언가일 수 있단 생각에 통화 버튼을 과감히 눌렀다.
“안녕하세요, 강북삼성병원입니다. 지난 12월 3일에 받으신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이 있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실까요?”
지금 들으나 다음에 들으나 내가 종양이건 물혹이건 뭔가 있다 한들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터. 알겠다고 하고 듣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와다다 이상 소견이 탑처럼 쌓였다. 골반 초음파 결과 오른쪽 난소에 물혹이 있어 추적 검사가 필요하며, 갑상선에도 결절 소견이 있으니 3개월~6개월 사이 추적 검사를 해보시라, CA-19 어쩌고 하는 표지자 수치가 높게 나왔는데 암 소견일 수도 있으니 한 번 내원하셔서 정밀 검사받아보시라…….
몇 개월 뒤에 어느 병원을 찾아가야 하나, 달력이나 리마인더 앱에 적어두기라도 할까 하다가 문득 정신과 영혼의 건강함도 2년마다 검사 지표를 남겨둔다면 심리적으로 조금 더 건강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올해가 불안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더 멀리 태엽을 감아 되돌려보면 아마도 임우유 어린이일 때부터 나는 줄곧 불안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아이는 크고 작은 돌부리에 늘 노출돼 있다고 봐도 된다. 노출돼 있다. 1990년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내겐 가정이 아닌 명제였다. 세 살 터울의 언니와 아래로 일곱 해 차이가 나는 남동생. 그 중간에 끼어 헉헉대며 자라던 내 유년기는 많은 것이 채워졌어도 모자라게 느껴질 법했는데, 그때 아빠까지 잃어야 했던 내 운명은 좀 치사하리만큼 가혹했던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맞지 않았고, 나는 엄마 밑에 있어야 더 잘 클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아빠가 우리 가족을 떠나기로 한 데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삼 남매 중 단호하고 냉정하게 엄마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한 사람도 내가 전부였다.
엄마는 비록 잔소리를 오천 번 하는 피곤한 엄마였지만 가정에 대한 책임감은 누가 뭐래도 대단했고, 삼 남매를 홀로 키워내며 억척스러워지는 것이 가슴 아파 보이지는 않을 만큼 나는 철이 없었다. 엄마의 철옹성 같은 책임감과 삼 남매의 무지가 조금씩 더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가세는 조금씩 반듯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백번 천번을 다시 고민해봐도, 그 결정이 맞고 옳았다. 우리 엄마 아빠는 하루라도 일찍 헤어졌어야 했다.
중학교의 그 누구도, 고등학교의 그 누구도 내가 가정환경이 불안한 아이라고 짐작하지 않았다. 설사 짐작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그런 말이 들린 적이 없다는 것은 대놓고 물어보지 않을 만큼은 불안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면담을 하다가 내가 편부모 가정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화들짝 놀랬고, 고등학교 때도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엄마랑만 사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다만 나까지 그걸 모를 수는 없었을 뿐이었다.
열여덟이었나, 열아홉이었나. 같은 반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 아빠를 잃은 것은 그 친구였는데, 나는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와서 그 소식을 듣던 교실에서 뛰쳐나왔다. 그 와중에도 같은 층 화장실에서 울기엔 염치가 없어서 아랫층 화장실로 내려가는데 친하고 착한 나의 친구가 황망하게 울면서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나를 따라와 줬다. 눈물이 하염없이 계속 떨어졌다. 아빠가 생각나서였다. 아빠는 살아있기는 할 것이었다. 살아있기만 할 것이었다. 아빠의 행방도, 몇 년 사이 제대로 해 본 연락도 없는 나는- 친구의 손을 붙잡고 우리 아빠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떡해, 어떡해, 그 말을 반복하며 어린 애처럼 펑펑 울었다. 무너졌다. 삼사 년간 멍울을 이고 지고 잘 걷고 있던 내 등 뒤로 심리적인 둑이 크게 한 번, 무너졌다.
스무 살이 넘어 대학생 때도 나는 꽤 의젓했다. 과하게 밝지도, 염려스러울 만큼 우중충하지도 않았다. 본가의 살림살이는 조금씩 더 나아졌고, 엄마는 긴 기다림 끝에 빚을 탕감하는 데 성공했다. 빚을 다 갚던 날, 엄마의 명랑하고 상쾌한 문장과 음성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빚을 다 해치워버린 엄마가 더 노력해준 덕분에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대출 없는 삶을 산 적은 며칠 없지만 이젠 매월 통장에 꽂히는 수입도 꽤 넉넉하고, 이제야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많은 고민 없이 사는 삶을 산다. 나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도 많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모나거나 밑동이 크게 헐어있지도 않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조금 거짓말일 뿐이다.
올 가을엔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유쾌하고 즐거운 그 드라마에는 어릴 때 임신해서 아이를 낳아 잘 살 줄 알았으나 남편이 이혼을 선언한 탓에 홀로 아이를 키워온 엄마가 나온다. 젊고 예뻤던 엄마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이 성정이 매우 억세지고, 아이는 아빠를 닮아 맹랑한 맛이 있는 조숙한 아이로 자란다. 아이는 어느 날 아침 공룡 카드를 갖고 싶다며 떼를 쓴다. 갖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버틸 수 있다고, 엄마는 아들을 어른다. 갖고 싶은 걸 다 갖고 살지는 못한다고. 그때, ‘난 아빠도 없이 살잖아!’ 엄마한테 맞받아치는 아들의 음성이 TV 스피커를 찢어지듯 튀어나와 공중을 갈랐다. 왈칵, 또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 없다고 얼마나 학교에서 많이 놀림 받았을까, 정작 그래서 슬펐다고 연기한 적은 없는 아역 연기자의 말간 얼굴을 보다 말고 엉엉 울었다. 즐거운 드라마 시청 시간 중 느닷없이 울음이 터진 아내를 달래야 할 반려자 친구의 당혹스러움까지 계산할 겨를도, 그땐 미처 없었다. 둑이 예상치 못하게 무너진 두 번째 경험이었다.
우리 엄마는 이제 번듯한 사람과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실버타운에 내려가며 텃밭을 일구는 주말을 누린다. 내 생활도 그럴듯하게 반듯하고, 반려자 친구와 가끔 크게 싸우긴 하지만 아직은 이혼도 안 했다. 그런데도 가끔 그렇게 둑이 무너지는 날은 언제고 또 올 것이다. 나의 감정적 뼈대는 어릴 적부터 조금씩 메말라 있어서, 비교적 건강히 지낼 수 있더라도 뼈에 물*이 들어차면 여지없이 아파 무너져 내릴 테니까. 아빠라는 칼슘이 유년기부터 충분히 공급된 것이 육안으로도 보이는 장성한 딸들을 바라보며 가끔 시큰한 눈가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구멍이 송송 뚫린 채로, 아빠가 아닌 다른 것들로라도 뼈대를 유지하며. 물이 차오르면 가끔 부러지면서. 보고 싶지 않지만 궁금하긴 한 아빠의 존재를 한 쪽이 비어 있는 웨딩 앨범 속 원판 사진이나,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오는 꽉 찬 남의 가족사진에서 떠올려내면서. 혈색이 도는 살가죽이면 충분하지 않냐고 위로하며. 혈색이 도는 살가죽만으로도 잘 살아진다고, 위로하며.
천천히 걸으면 잘 안 부러질 거야. 아주 아주 천천히 걸으면 뼈가 부러져도 부러진 줄 모르고 걷게 될 거야. 이따금 주저앉더라도. 주저앉아서 펑펑 우는 날이 십 년**에 한 번쯤 오더라도.
* 골다공증과 글 중 ‘물’의 의학적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눈물이 구멍 난 감정적 뼈대를 메우는 순간이 오면 무너지겠다, 하는 문학적 허용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 글 쓰다 찾아보면서 알았는데 뼈는 평생 생성, 성장, 흡수의 과정을 반복하며 변하는 장기라고 합니다. 10%의 뼈가 매년 교체돼 10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뼈로 교체된다네요. 뼈의 구조, 교체율, 무기질화, 미세 손상 등이 뼈의 질에 영향을 주는데, 뼈의 질을 측정할 정확한 지표는 아직 없는 탓에 골다공증 진단에는 골밀도를 활용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줄의 ‘십 년’을 부연하기 위해 덧대어 둡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골다공증 [osteoporosis] (국가건강정보포털 의학정보, 국가건강정보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