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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Nov 29. 2021

역시 겨울 생은 겨울이라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기쁨



역시 겨울 생은

겨울이라


 날이 제법 차다. 제법, 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부족할 만큼 차디찬 것 같기도. 사계절 중 가장 짧은 계절은 봄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을도 봄 못지않게 짤막해진 것 같다. 미신 같은 소리지만 태어난 계절이 그 계절 생들을 조금은 구원해 준다고 믿는다. 봄 여름철에 힘들다가도 찬 바람 부는 가을 시즌을 넘어가면 활기가 솟아났던 게 이미 여러 해이니 적어도 겨울 생인 나에겐 경험칙쯤은 된다.


 작년과 올해도 지옥 같은 봄 여름을 보냈다. 작년은 더 처참했고.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은 나아서 별일 없이 지나가려나 했는데 봄 여름의 우울은 따끈한 날씨만큼 열기가 거셌다. 출퇴근 길이 날을 거듭할수록 어둑해지고 콧가에 닿는 바람결이 차가워질수록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빌었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면 나도 이 망막해 보이는 우울에서 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그렇게 노랗고 빨갛게 나뭇잎이 물들고, 산의 전신이 총천연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찰나를 지나니 어느덧 겨울의 초입이었다.


 삭막한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멍해질 때쯤 일순간 어딘가로 향하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이른 퇴근을 하고 가고 싶었던 먼 곳에 갔다가 또 먼 길을 되돌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부산한 업무를 한 귀퉁이로 몰아넣고 냅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싸늘하지만 끝이 무딘 바람을 쐬며 버스에 몸을 싣고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반도 되기 전이었다. 적당히 밀린대도 그다지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듬성듬성 캐럴이 울리는 가게들을 지나는 초행길은 조금 신이 났고 목적지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등장했다. 요조 언니가 서울에 열었던 서점을 닫고 제주로 서점을 옮겼던 게 아쉬웠었는데 마침 서울에 분점이 생겨 찾아올 수 있었다. 안에 언니가 있건 없건 그냥 오늘은 그 서점에 가서 양다솔 작가의 산문집을 사 들고 오고 싶었다. 1분이면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는 책을 두고, 이 긴 긴 길을 내 발로 밟고 와서 굳이 굳이.


그날의 책방무사 서울점(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29길 20)


 따뜻한 적갈색의 서점에서는 책방만의 디퓨저 향과 새로 공사한 곳에서 나는 인테리어 향이 섞여 났다. 앤티크한 조명, 《Call Me by Your Name》 LP판이 기댄 벽, 돌아가는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아늑한 노랫소리, 크리스마스스러운 작고 귀여운 소품들이 차지한 선반 한구석. 앨범과 큐레이션 된 책들이 가득한 넓지 않은 소박한 서점을 둘러보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려던 책은 싸인 본으로 두 권이 매대에 올라가 있었고, 옆에는 아직 못 사고 있던 이슬아 작가의 신간 2종도 함께였다.

 한 권만 사려던 손에 기어이 세 권이 들렸다. 결제하면서 요조 언니는 비건 젤리인데 드셔보시라며 파인애플과 자몽 맛이 섞여 있는 젤리 한 팩을 건넸다. 들고 갈 데가 마땅치 않다면 책방 손님들이 기증하고 간 천 가방에 담아가시라는 말에 그중 제일 위에 있던 빨간 가방을 골랐다. 스누피가 작게 프린팅된 가방은 태그도 떼지 않은 새것이었다. 어디서건 무엇에서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은 책방 도장이 찍힌, 새것이면서 새것이 아닌 가방에 오늘 산 세 권의 책과 젤리를 담아 나왔다. 걷다 보니 한쪽 어깨가 조금 빠질 것 같았지만 아무렴 괜찮은 것 같았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는 김밥 맛집이라는 김밥집에 들러 김밥을 두 줄 포장했다. 사무실을 나설 때보다 한층 무거워진 짐을 싸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찬바람에 숨이 턱턱 찼다. 또 꼬박 한 시간을 걸려 도착한 집에선 홀가분하게 짐을 끌러 놓고, 맥주 한 캔을 냉동실로 옮겼다. 세수하고 나와 김밥을 짠하고 펼쳐놓고 그새 살얼음이 조금 낀 맥주를 콸콸 따랐다.


 봄이 돌아오겠지. 햇빛에 새순이 움트면 내 안의 어딘가가 또 요동치고 말겠지만, 오늘은 오늘의 겨울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환기를 위해 활짝 연 창문에서 연신 찬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켠 맥주는 이 세상 맛이 아니었고, 나는 속으로 ‘역시 겨울 생은 겨울이야’ 하며 웃었다. 아무도 듣지 못한 웃음소리였지만 그것 역시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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