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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Dec 01. 2021

구두와 이별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체념



구두와

이별


 외출할 때 구두를 신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운동화에 의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유독 땅굴 같은 7호선을 끼고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라면 출근할 때 그다지 격식을 갖춰 입기 귀찮아졌다는 것. 마지막이자 가장 내놓기 꺼림칙한 이유라면 이제 나의 몸이 더는 구두스러운 옷차림을 버틸 만큼 젊지 못하다는 것이다. 굽이 낮은 구두라도 대개는 발 앞부분을 조이게 되어 있는 탓에 오랜 외출에는 몹시 취약하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굽이 8센티 되는 구두를 신고도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 다녔던 적도 많지만, 그것도 옛날얘기다.

 고민도 없이 운동화를 구겨 신고 해괴망측한 몰골로 어둑한 새벽을 가르며 출근길에 나서면서 불현듯 서글퍼졌던 적이 있다. 구두가 필요한 옷차림을 좋아하고 또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 믿었는데, 이젠 믿음이고 나발이고 몸이 불편하고 힘든 것이 더 눈감아주기 힘든 사실이 됐다는 것이. 이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좋아하는 무언가와 피할 수 없는 이유로 멀어지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지하철 역사로 향하는 깊숙한 계단을 수십 개 연달아 내려가면서 곧 잊어버렸지만.


 얼마 전엔 《톡이나 할까》라는 프로그램 종영 회차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간 프로그램을 찾아준 게스트들이 과거의 본인에게 남겼던 메시지들을 보다 펑펑 울었다. 정세랑 작가가 평온한 표정으로 과거의 본인에게 남긴 몇 줄의 메시지 때문이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 5년 전의 나에게,

  아직 상상할 수 없겠지만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길이 나뉠 거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과

  믿을 수 없이 가까워질 거야.


 아직 상상할 수 없겠지만,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길이 나뉠 거고……. 문장을 잘게 쪼개서 읽어도 꿀꺽 삼켜지지 않는 단어들의 무게에 한 번 와르르. 생각나는 얼굴에 다시 한번 와르르. 마음속 모래성이 연거푸 무너졌다.


 몇 해 전 내게는 국수 ― 물론 본명은 아니다 ― 라는 친구가 있었다. 국수와 나는 가까운 사이였고, 우리 둘 외의 다른 두 명의 친구와도 그랬다. 나는 나를 포함한 넷 모두의 결혼식에서 우리가 서로 울어줄 사이라고 생각했고,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든 일 년에 서너 번쯤은 만나야 하는 사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복기할 수 없는 언제쯤, 넷이 함께 있던 단체 채팅방에서 이야기의 밀도가 점점 성글어진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넷이 있었지만 넷의 것 같지 않은 방, 국수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여러 차례 무응답이 거듭된 후에야 나머지 셋은 서로의 사이가 이전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믿었던 관계의 종식은 뼈아팠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한부 환자처럼, 처음엔 부정해봤다. 그다음엔 어째서 그랬던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슬퍼도 보고. 그래도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이럴 수 있냐며 참다 참다 속으로 화도 내보고. 한두 해에 걸쳐 그 모든 단계를 거친 뒤에야, 어떤 관계는 이렇게 떠나기도 한다는 것을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과 믿을 수 없이 가까워질 거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길이 나뉠 거라던 말 다음에 나타난 이 문장은 그래서 치유와도 같았다. 나 말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어떤 관계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멀어지기도 한다는. 모든 관계의 탄생과 소멸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며, 또 그 덕에 소멸이 있는 만큼 다른 저편엔 관계의 탄생도 있을 거라는.


 돌이켜 보면 교복을 입던 학생 때부터, 아니 코흘리개 유치원생 시절부터 줄곧 겪어온 일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일, 내가 좋아했던 누군가가 나를 좋아했던 일, 영영 가까이 있을 줄 알았던 친구와 끝도 없이 멀어지는 일.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을 잘못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 내가 잘못한 일도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몰랐던 일인 것처럼 속아주는 사람을 만나게도 되는 일.


 구두는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그저 나이 들어 버린 몸이 자연스럽게 운동화를 더 가까이하게 되듯이, 그런 불가피한 이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그 사실이 눈이 맵게 아파도 받아들여야겠지.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신어야만 알 수 있는 흙의 질감도 있을 테니까. 아니면 적어도 이런 수용을 위해 흘러간 시간의 보상으로서 어른의 증표 같은 걸 쥐게 될 수 있을지도. 비록 단 한 번도 원해본 적 없는 증표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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