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 아니 풀네임을 늘어놓으면 조금 느끼한 느낌이니까 그냥 준말인 브라라고 하겠다. 성인 여성이 브라 끈을 스스로 채울 수 없을 때의 그 막막함을 아시는가? 내 나이 서른 어쩌구. 브라 끈을 채우는 일은 2차 성징이 시작되고 난 중학교 무렵부터 20년쯤 해온 일이며, (사실 뒤에 있는 후크를 채우는 일이라 눈을 감고 하나 뜨고 하나 별다르지 않지만) 아마 내가 눈 감고도 해치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브라 끈을 채우는 일이 몹시 힘에 겹다고 느껴버린 것이다.
어깨가 조금 뻐근하다, 이것이 약 보름 전 내가 처음 느낀 감상이었다. 잠을 잘못 자면 으레 이런 일들이 일어나곤 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주일이 지나도 상태가 크게 나아지지 않기에 나는 사라진 재택근무를 탓하기 시작했다. 엔데믹이 곳곳에서 선언되면서 우리 회사도 본격적으로 재택근무 줄이기에 나섰고, 출퇴근 풍경과 사무실의 인구밀도가 크게 변화했다. 통근버스에서는 펜데믹의 기간 동안 감염 예방을 위해 붙은 두 좌석 중 한 칸을 아예 비워두고 운행했으나, 이마저도 엔데믹의 시기를 맞아 사라졌다. 이런 여러 변화들이 내 어깨 조지기에 역할을 일부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백 퍼센트 탓만은 아니었다.
브라를 처음 채우고 푸는 걸 배운 어린 소녀가 된 것처럼 배쯤에 후크를 두고, 정면으로 내려다보면서 후크를 잠근 다음 다시 등 뒤로 돌려 팔을 양 끈에 한 쪽씩 끼우면서 망연자실의 상태로 몇십 초의 시간을 날려버렸다. 집에서 나오면서 허공에 어깨를 휘휘 돌려 보았으나 이전의 부드러운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주하는 집과 시/도가 다른 곳으로 통근해야 하는 사람의 비애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픈 데가 생겼으면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집에 돌아오고 나면 이미 병원에 가긴 늦은 시간이 되는 것이 문제였다. 화타가 지근거리에 있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집 근처에 야간 진료를 하는 한의원이 있기에 거기서 치료를 시작했다. 물리치료를 하고, 부항을 뜨고, 침을 열 몇 개씩 꽂고, 약침을 놓아도 보고……. 이틀에 한 번씩 한의원에서 카드를 긁어가며 비슷하고 조금씩 달라지는 한방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약속 자리에 나가서 페퍼로니 피자의 페퍼로니 토핑처럼 붉게 피멍이 든 어깻죽지를 보이며 놀라게 한 친구들이 열 명이 넘어가도록, 브라 끈을 내 의지대로 채우는 데 겪던 어려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의원에서는 오른쪽 어깨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며 관절 유착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디자인을 하시냐고 물었다. 사실 디자인 툴을 일반 사무직에 요구되는 수준에 비해 과하게 다루는 편이긴 하지만 전문직으로 디자인을 하는 건 결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오십견이 보통 그 나이쯤 와서 오십견이긴 한데요, 드물게 젊은 분들한테도 생겨요. 한의원 원장님은 아프기 시작한 뒤 바로 병원을 찾지 않은 나를 조곤조곤 책망하며 나으려면 오래 걸릴 것이며, 짧게는 반년 정도가 더 걸릴 거랬다.
집에서는 반려자 친구가 한의원을 그만 다니라고 성화였다. 그렇게 부항이며 약침 치료를 해봐야 금방 낫지도 않으며, 한의원에서 해주는 갖가지 치료라는 것이 근육 이완을 돕는 것인데 그렇게 풀었다 굳었다 반복하면 낫는 거 같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와 희망 고문만 남길 뿐 경과는 오히려 더 안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의 도움 없이 이 어깨 질환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또한 한의원에서 엑스레이도 안 해보고 내린 ‘오십견인 것 같아요’라는 진단을 그대로 믿기에는 나는 너무 젊은 것 같았다.
우리 회사 익명 게시판은 대체로 별것 아닌 글들이 대부분인데, 익스플레인이 생활인 분들이 넘실대는 덕에 가끔은 꽤나 유용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좋은 조건에 롤렉스를 사는 법이라든가, 차 수리를 잘해주는 곳이라든가, 아플 때 찾아야 하는 병원이라든가……. 어깨에서 나는 우두둑 소리를 듣자마자 근무를 하다 말고 익명게시판에 접속한 나는 새침하게 ‘어깨’라는 두 글자를 검색창에 쳤다. 엔터 키를 누르자마자 ‘어깨’에 하이라이트 된 게시물들이 주르르 스크린에 나타났다. 그중 질환이 나와 정말 유사한 분의 글을 발견했는데, 역시나 그분의 질환도 오십견이라고 했다. 댓글이 마흔여섯 개쯤 달려 있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녀보고 효과를 본 병원과 의사 이름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우리 집 근처 동네의 마취통증의학과 한 곳도 언급되어 있었다. 6개월 동안 지지부진하던 어깨가 여길 다니고 한방에 나았다고 쓰여 있었다. 찾았다, 내 병원!
그 병원은 평일에만, 그것도 저녁 6시 30분까지만 하는 병원이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쉬게 된 사흘간의 경조사 휴가로 찾아갈 시간을 겨우 낼 수 있었다. 병원은 마치 김앤장처럼 각각 윤 씨와 장 씨의 두 원장님이 진료를 보는 곳이었다. 소개받고 온 원장님이 따로 없다고 하자 순번상 더 빠르게 진료를 볼 수 있는 윤 원장님 앞으로 대기자 이름을 올려주셨다. 마취통증의학과는 이비인후과나 내과처럼 순번이 2분에 하나씩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천천히 순번이 줄어드는 동안 초조함이 등짝 뒤로 소름처럼 돋았다. 만나면 헤어지자고 할 것 같은 남자친구를 보기 싫은 날처럼, 오십견이라는 진단을 마침내 만나야 할 것 같은 순간이 분초 단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 원장님은 어디가 아파서 오셨냐고 했다. 어, 어깨가 안 좋아서요. 회전이 잘 안되는 거 같고… 예전만큼 잘 안 움직이는 것 같아요. 윤 원장님은 팔을 귀 옆으로 붙여서 들어보라고 했다. 잘 안됐다. 옆으로 뻗어볼까요? 이것 역시 잘 안 뻗어졌다.
“어, 그거 오십견인데…”
이내 윤 원장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내가 고자라니’ 짤이 대사만 변형된 채 머릿속에서 연이어 재생됐다. 내가 오십견이라니. 이 내가 오십견이라니…!
“일단 엑스레이 촬영 먼저 하고 오세요. 그러고 다시 소견 확정하겠습니다.”
엑스레이 촬영은 삼사 분 만에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나는 다시 윤 원장님 앞이었다.
“이거 이거 보이시죠? 여기가 이렇게 붙어있죠? 오십견은 여기 이쪽이 조금 까맣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지금은 그렇게까지 된 건 아니에요. 아주 심각한 건 아닙니다. 오십견 맞는 것 같긴 한데, 저쪽 가서 좀 더 자세히 보시죠.”
진료실과 붙어 있는 공간으로 물 흐르듯 이동하니 거기엔 스크린들과 기계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자리에 앉은 뒤로 어깨에는 차가운 젤 같은 것이 발라졌고, 실시간 엑스레이가 화면에 보였다.
“지금 이거 붙어 있는 부분 보이죠? 여기에 주사를 놓을 건데, 이게 벌어지는지 한번 봅시다.”
윤 원장님은 내 옆에 앉아서 간호사분이 전달해 준 주사기를 받아 들고는 아플 거라고 말씀하시며 주삿바늘을 어깻죽지에 냅다 꽂아버리셨다. 짜릿한 바늘의 통증이 와다다 밀려 들어왔다. 아아아, 너무 아파요! 아악! 하는 나 같은 환자는 이미 많이 보셨다는 듯 무미건조한 반응조차 없던 원장님은 이어서 바늘을 더 깊숙이 꽂은 채로 무엇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사액을 쏘아보셨다. 화면에 비친 내 어깨의 근막으로 추정되는 것이 벌어졌다. 벌어지는 거 보이시죠? 오십견 소견을 확정하는 수순인 것 같았다. 바늘이 꽂힌 채로 나는 여러 소리를 들었지만 기억나는 대화는 이런 것들뿐이다. 이건 오십견 소견이고요, 이것도. 이것도 그렇고요. 아, 이건 오십견 소견은 아니에요…….
윤 원장님은 어깨 가동범위를 늘릴 수 있는 세 가지 스트레칭을 알려주셨다.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힘든 지점이 오는데, 절대 힘들기 직전에 멈추지 말고 힘들어 뒤질 때까지 한 다음 진짜 더 이상 하면 딱 죽겠다 싶을 때 30초를 버텨야 한다고 했다. 주사 치료는 단순 보조 역할이며, 낫는 것은 꾸준한 재활 스트레칭에 달려 있다는 강조도 잊지 않으셨다. 오십견 증상 치료는 아팠던 기간을 포함해 최소 반년에서 최대 2년 정도는 내다보아야 하므로, 내게도 최대 1년 8개월 정도의 재활 기간이 남아있는 셈이랬다.
집에 와서 TV에 유튜브 영상을 틀어두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한 번 할 때마다 어깨 근육 위 아래 양쪽에 개구진 초딩이 한 명씩 매달려서 그네를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찌릿함과 저릿함이 각각 1대 1의 비율로 합쳐진, 한 마디로 쩌릿한 통증이었다. 등줄기에서는 연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마에도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이제 농담으로라도 싫어하는 사람에게 건강하시라는 덕담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건강은 정말이지 너무도 소중한 거니까, 싫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턱턱 빌어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후끈해진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마지막 세 번째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윤 원장님이 말씀하신 힘들어 뒤질 때까지의 순간에서 버티는 30초는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운동이란 걸 평생 해온 적이 없는 몸뚱아리임에도 별다른 병치레나 입원 없이 골골거리며 살아온, 언제나 내 변변찮은 자랑거리 중의 하나를 담당해 온 그 안일했던 삼십여 년간의 세월이 쩌릿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