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 우울증 극복기
내가 하는 일은 딱히 어려운 일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대단한 직무도 아니었고, 그냥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파트타임이었다. 파트타임이라고는 하지만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풀근무였고, 식대는 제공되지 않았지만 1개월 만근 시 월차가 지급됐다. 3개월 정도 기간이 정해져 있는 계약직 파트타이머. 그럼에도 나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간에 딱 맞춰 출근해서 문을 열고, 음악과 커피머신을 켜고, 모든 공간을 점검한다. 메인PC를 켜고 오늘의 스케쥴을 확인하고 나면 오픈 준비는 끝났다. 대관 스케쥴이 있으면 대관 공간과 장비, 비품을 점검하고 대관자가 방문하면 안내한다. 가끔 건물 입주사들이 회의실을 사용하러 오면 예약을 잡아주고 카드를 대여해준다. 중간 중간 탕비실을 점검하고 비품을 채워준다. 사용이 끝난 공간은 간단하게 점검하고 환기시켜준다. 한번씩 매니저님들이 부탁하는 간단한 문서작업을 도와드리기도 한다. 하루가 끝나면 공간을 점검하고 문을 잠근다.
워낙 간단한 일이기에 금방 적응했다. 어쩌다 내부 행사가 있으면 인원 체크 겸 보조 스태프 일을 했다. 별 거 없었다. 오히려 덕분에 무료 강의를 들을 수도 있었다. 방송사에서 들어오는 대관 문의 전화도 가끔 받았지만 나는 일정과 연락처만 체크 후 매니저님께 전달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반복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출근을 하는 것, 나의 업무가 있는 것, 주말에는 직장인의 여유를 보내는 것, 그것 자체로도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이따금씩 매니저 분들의 하소연도 들었다. 회사가 제대로 안챙겨준다느니, 가능성 없는 업무를 자꾸 진행하라고 한다느니. 그러면 나는 여기도 여느 회사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브랜드 네임만 보면 꽤 그럴듯한 것이, 막상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여기저기 빈틈 투성이였다. 그건 마치 사람과도 같았다. 있는 힘껏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속 빈 강정인 인간, 나와 같은 인간 말이다.
"여우 매니저님 곧 기간이 끝나가네요."
"아, 맞아요."
"아쉽다. 매니저님 있어서 편했는데."
정규직 매니저님들은 내 덕에 업무가 좀 덜했다며 고마워하셨다. 무엇보다 성실히 해왔다는 걸 좋게 봐주신 것인지 계약기간이 종료되기 직전 부대표님이 먼저 정규직 제안을 해주셨다. 매니저 분들에게 들어보니 평이 아주 좋고 성실하다고, 혹시 같이 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비품 정리를 하던 중 갑작스레 들은 제안이었지만, 사실 매니저님들이 이미 귀뜸을 해주셔서 그렇게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미친듯이 다음에 일할 직장을 구하고 있었지만 '좋은 제안을 이미 받아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게 가장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거절이었다. 그래도 요령 피우지 않고 뭐든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 기간은 '나의 쓸모'를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사는 나에겐 어떤 비용이든 빠듯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굴러가지 않을 정도여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단 할 수 있는 일에 주목했다. 전공을 살리는 직무는 이미 포기했고, 내가 그나마 배운 것은 초라한 바리스타 자격증과 몸 뿐이었다. 하지만 주말에 일을 하는 일은 정말 싫어서 오피스 단지가 많은 조그만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내일부터 시작이야. 새로운 내가 되어야지. 마음 먹은 것은 고작 일주일 정도였던 것 같다. 사장님과 함께 일을 하는 카페는 차라리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기 원했지만 오히려 파리 날리는 날도 잦았다. 오전 손님이 없을 때면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눈치를 봤고, 제대로 쉬지 못해 금방 자리에 돌아왔다. 마감조로 일을 할 때면 퇴근하신 사장님께서 CCTV를 보다가 전화가 왔다. '여우야, 더 크게 인사해야지' 그럼 나는 청개구리처럼 더더욱 일이 하기 싫어졌다.
"인사 크게 하고, 더 웃고. 그리고 노래가 이게 뭐야, 노래 좀 바꾸자."
"면접 볼 때는 되게 밝았으면서, 왜 그래."
나는 태생이 밝은 사람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큰 사람도, 구김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척'한 거다. 처음 보는 사람에겐 그게 제일 잘 먹히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없는 모습을 요구하는 사장님의 모습이 더욱 더 나를 죄여왔다. 아-. 나는 또다시 나의 쓸모를 잃고 말았다.
"여자를 뽑는 것은 일보다는 여자이니까 뽑는 경우가 많대. 특히 얼굴 마담같은거."
"근데 나는 일을 잘 하고 싶은거고, 사람들에게 말 걸고 웃어주려고 하는거 아닌데."
"그렇지, 근데 사장님 의도가 딱 그거잖아."
"맞아..."
사장님은 내가 음료 만드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카운터에서 살갑게 웃으며 인사하길 바라셨다. 음료가 나가는 것보다는 주문이 먼저고, 주문보다는 웃음이 먼저고. 내가 열심히 레시피를 외우기 보다는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길 바랐다. 거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 아무래도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요."
"너 갑자기 이러면 매장은 어떡하니?"
"죄송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하고 갈게요."
몇날며칠을 고민하던 말을 드디어 꺼냈을 때 사장님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미리 대비했음에도 나는 그의 따가운 말투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퇴사를 준비했다. 마지막 주, 나는 매장에 일이 생길 때마다 도와주시던 관리소장님께 감사인사를 했다. 순간이었다. 소장님의 휴게실에 들어가자마자 소장님이 문을 닫아버린 건.
소장님은 곧바로 나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인사도 해주러 오고, 예뻐죽겠다고. 나는 잠시 가만히 있었지만, 곧이어 불순하게 움직이는 소장님의 손때문에 애써 그 품에서 벗어났다. 아니에요, 저 인사했으니 이제 가볼게요. 그 말을 무시하며 소장님은 다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예쁜 것. 뽀뽀나 한번 할까? 그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뇨. 제가 소장님이랑 뽀뽀를 왜 해요..!"
"딸 같아서 그래, 딸 같아서."
"저희 아빠랑도 뽀뽀는 안해요, 그리고 저 남자친구 있어요!"
"남자친구 있으면 뭐? 걔랑 결혼할거야? 아니잖아."
남자친구 몇 살인데? 뭐 하는 놈인데? 그렇게 잘났어? 어차피 너랑 결혼 안한다니까. 소장님은 나를 거칠게 잡아끌며 입을 맞추려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어디서 나온 힘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소장님을 밀쳐냈고, 소장님은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그런건 안중에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주차장에서 혹여나 소장님이 쫓아올까 매장으로 뛰어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다.
그제야 알았다. 왜 별 것도 없는 우리 매장에 매일 오고, 커피를 사고, 일을 도와주고, 주변을 맴돌았는지. 어쩌면 진짜로 나의 쓸모는 그런 것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