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우울과 마주하다

챕터 2 - 우울증 극복기

by 여우씨

미치도록 죽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건 언제나처럼 평온하고, 예기치 못할 때 찾아왔다. 이제서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고 생각한 날,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날, 바람 한 점 없는 듯 잔잔한 날. 꼭 그런 날이었다.


"너 A 남친이랑 같이 있었잖아."

"그건 맞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럼 왜 걔가 거기까지 갔는데."

"나 그냥 일하니까,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놀러오라고 한 것 뿐이야. 근데 진짜 올 줄은 몰랐지. 그리고 A, 남친이랑 헤어졌다며."

"헤어졌는데 다시 만날지 얘기 중이었대."

"그러니까 난 그걸 몰랐잖아, 그리고 나는, 나는."

"D 좋아한다고?"

"......"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가 A 남친이랑 있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이제서야 막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룹에서, 나는 또 여우같은 년으로 찍혀버렸다. 난 그저 연락이 오길래 답장해준거고, 그 애가 끊지 않아서 회사 근처에 놀러오라고 인삿말을 한 것 뿐이었다. 그 인삿말 하나에 진짜로 그 애가 올 줄도 몰랐고- 무엇보다 그 애와 A는 이미 헤어졌다는 얘길 들었던 후였다. 계속 사귀고 있었다면 그러지도 않았을 거야. 그런 내 말이 무색하게 B는 까칠하게 나를 쏘았다.


"아니 애초에 너 걔한테 관심 없는데 그렇게 받아준 것도 문제 아니냐?"

"그럼 연락이 오는데.. 나 걔랑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씹을 수도 없잖아."

"받아주지 말았어야지."


너 잘못이야. 너가 받아줘서 그래. 너가 답해줘서 그래. 너가 답만 안했어도, A랑 그 애는 잘 만나고 있었을걸.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이 헤어진 이유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A의 남자친구는 단순히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지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그 애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한 적도, 스킨십을 한 적도 없다. 그저 정말로 회사 근처에 놀러온 그 애에게 커피 한잔 사주고 다시 내 할 일을 하러 갔을 뿐이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지. 근데 그 애가 나한테 관심을 보인게, 다 떠나서 둘이 헤어진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걔 너한테 오기 전에 A랑 있었다더라. A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그래서 다시 만날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더라."

"....."

"근데 널 만나러 오는게 맞냐?"


B의 말엔 은연중에 '너가 뭔가를 했지?' 라는 확신이 차있었다. 나는 계속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눈물이 새어나왔다. 서러웠고, 억울했고, 답답했다.


"나 걔한테 관심없어.....진짜야.."

"....."

"...미안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나는 결국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나는 역시 구제불능인가 봐.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잠은 늘어갔다. 늦잠이 많아졌고, 지각하는 횟수도 늘었다. 일하다가 중간에 잠드는 경우도 많았다. 마음이 피폐해질수록 몸도 아파왔다. 더이상 평범하게 일하는 건 힘들었고, 늘 앓고 다니는 몸살에 못 이겨 수액을 맞으러도 다녔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화를 조절할 수 없게 되자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침대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전부 내 잘못이라면, 나는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이랬는지, 유아기 때 형성이 된 건지,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나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펜을 잡았다.


유치원생.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말을 못했다. 갖고 싶은 것이 생겨도 말하지 못했고, 언제나 아빠 눈치를 보았다. 돈이 아까워서 언니는 서슴없이 비싼 것을 고를 때 일부러 싼 것을 고르기도 했다.


초등학생. 소심하고 친구가 없어서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었다. 일부 몇몇 아이들이 나를 보고 귀엽다고 했지만, 그냥 불쌍해서 거짓말하는거라고 생각했다. 고학년이 되었을 쯤 여자애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욕을 했다. 나는 그 아이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와서 친구가 되고자 엄청 노력했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반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 그 친구는 바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혼자인 생활이 싫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자주 했다. 선생님에게 그리 예쁨 받는 학생 또한 아니었다. 졸업식 때는 같이 사진 찍을 친구가 없어서 부모님이 안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나에게 예쁘다고 해주는 친구가 생겼다. 그 역시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친구를 사귀었지만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친구이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인원수 맞추기' 같았다. 그러다 가끔 홀수가 되면 나는 알아서 맨 뒤에서 혼자 걸었다. 친구들이 앞에서 다른 얘기를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반에서는 나를 싫어하는 여자애가 늘 나를 흘겨보았다. 초등학생 때 그 여자애가 생각났다. 그 아이와 똑같은 눈빛과 똑같은 말투로 나를 싫어하는 뉘앙스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뭘 쳐다봐? 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맘때쯤이었나,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게.


고등학생. 우습게도 나는 내가 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어찌저찌 먼저 말은 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친해지는 것은 무리였다. 이미 무리는 정해져 있었고, 그들은 벌써 친해져 있었다. 또 나 혼자일까? 우울해 할 때 쯤 구석에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용기 내서 말을 걸었다. 그 아이는 소위 말하는 '오타쿠' 그런 느낌이었다. 실제로 애니를 좋아했고, 만화를 잘 그렸다. 만화책 추천도 해줘서 그 아이 덕분에 빠진 애니도 있었다. 그 아이는 좀 통통했고, 안경을 썼고, 피부도 좋지 않았다. 외모에 민감한 고등학생 여자애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딱 좋은 아이였다. 그래서 나도 가끔 그 애에게 틱틱해곤 했다. 나도 모를 우월감? 그런 것들이었나. 그 때도 여전히 날 싫어하는 여자애가 있었다. 똑같이 나를 흘겨보고, 비웃는 아이였다. 그 여자애는 내 친구에게 늘 살 좀 빼라고 놀렸다. 나에게는-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그냥 싫어했던 것만 기억이 났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을 만났을 때, 혹은 만나면서 뭔가 실수를 하진 않았다. 딱히 대화를 나눠본 것도 아니었고,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이었던 것 같다. 어둡고 칙칙해보이는 아이가 말도 제대로 못해서 버벅이고 어설프게 웃는 것이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의 난 최악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내 잘못인걸까?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게, 결국 내 탓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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