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 우울증 극복기
"그거 그냥 너랑 한번 자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대학교 동기인 현이 말했다. 그 형, 아무 여자한테나 특히 처음일 것 같은 여자한테 그러는거 남자들은 다 알아. 나는 그래?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든 말든 나랑은 관계없는 얘기였다. 어차피 난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하지만 눈치 없는 현이는 말을 이었다.
"너 민이(전남친)도 너랑 잔 거 얼마나 자랑처럼 얘기했는 줄 아냐?"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걔한텐 그게 업적이라니까, 업적. 남자들 다 똑같아."
그럼 너는? 너는 뭐가 달라? 그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아냈다. 원치 않은 첫 경험을, 원치 않은 사람과, 원치 않은 방식으로 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있을까. 그게 누군가에겐 가십거리, 그리고 또 하나의 업적이 된다는 것이 씁쓸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다르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얘기하는 내 앞의 이 사람도.
"현이 나한테 고백했다?"
동기 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하고 되묻자 은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 쫓아다니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고백이라니, 너무 어이 없잖아."
"그러게.."
그 역시도 결국 진심보다는 업적이 먼저였던 것이다.
과 대표 '여우'가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문은 또 소문을 만들고, 허상을 만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여러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나를 보며 수군거렸고, 남자들은 치근거렸다. 여자 선배들은 가끔 나를 불러 괴롭혔다. 그녀들의 기분이 상하는 날, 나는 그녀들의 스트레스 해소제가 되었다. 난 혹시라도 그들의 눈에 띌까봐 전전긍긍하며 다녔지만 매일 얼굴을 봐야하는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의기소침해지고, 자존감이 바닥을 친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가 나 꼬셨잖아.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내가, 어떻게 했는데?"
"너 나한테 웃어주고, 대답도 잘 해주고, 그리고 전화도 받아줬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운 이유였지만 멘탈이 바스라져 있던 나에게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이유였다. 내가 잘해주긴 했어. 근데 그게 사귀어야 할 명분이 되는건가? 난 그냥 친구로서 잘해준 것 뿐인데.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동안에도 유일하게 곁에 있었던 게 그 애라, 그래서 밀어내질 못했다.
"내가 손 잡았는데 안뿌리쳤으니까, 우리 사귀어야 해."
"아... (그게 그렇게 되는건가?)"
가스라이팅 당하는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미 무너져 있는 나에게, 세상에게 버림 받은 것만 같은 나에게 '유일하게'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사람은 그야말로 세뇌당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너가 이랬으니까, 저랬으니까, 그렇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넌 나한테 이렇게 해줘야 해. 너에겐 나밖에 없어. 내가 유일한 너의 편이야. 그러니까 넌 날, 거부하면 안 돼.
내가 자아를 가지면 가질 수록, 그 아이의 집착은 더욱 거세졌다.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마치 강아지를 달래는 듯한 뉘앙스로 나를 가르치는 그 모습이 역겨웠다. 나의 반항심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날, 그 아이는 나에게 말했다. 너 딴 남자 생겼구나? 그게 아니면 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데?
나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 빈을 만났다. 길거리를 함께 걷다가, 잠깐 얘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나, 있잖아. 너무 힘들어. 너무너무 힘들어 미치겠어. 내 울음에 빈이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금방 토닥여주었다.
"너 그런 사람 아니야. 너 정말 좋은 아이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그 날에서야 나는 그 애와 헤어질 수 있었다.
우울증과 마주하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상처들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나는 잘 하는게 없어.
성격도 답답하고, 착하지도 않아.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표현하면, 경계하고 의심해.
나는 잘난 게 없거든.
나 같이 음침하고 어두운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겠어.
저 사람도 지금은 웃고 있지만, 속으론 나를 싫어하고 있을거야.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없어졌으면 해.
나는, 나를 미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