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추출물을 가장한 향들이 코를 찌륵이게 한다.
옷감은 후덥지근한 곳에서 상하지 않는구나.
결국 사는(生) 기쁨이 사는(買) 기쁨이구나.
축제의 장(場)에 참예하지 못하는 나는 풀이 죽어 허위를 찾으며 아니라는 둥 대강 훑거나,
사는 기쁨에 매료된 이들을 빠안히 바라본다.
나 역시 그러고 싶지 않으랴.
나는 간혹 이 곳이 좋아질 때가 있다. 대부분의 애정과 무거운 동정이 섞인 돈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 돈은 내 손에서 가벼워지고, 난 잔뜩 구겨진 살들을 내 눈에 보이는 곳만 가린 채 상품 사이를 삼가며 비집는다.
내가 보는 것은 거기서 거기. 내 기호는 이미 정해졌다.
왜 난 이곳에서 작아지는 걸까. 왜 난 이곳에서 그들이 미워질까. 왜 난 이곳에서 체제를 탓하는 것일까.
물질 문명이라는 어려운 말을 써가며, 자신의 소리의 귀를 기울이는 수많은 솔직한 이들을
부러워하다가, 씹기도 하고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숭고를 탐하며 구토하는 그 수많은 자아를 또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그 순간. 내가 작아지는 순간은, 반드시 내가 커져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살면서 살 건 많다. 허무와 허영으로만 치부하다간 질투가 뿜어내는 담즙을 게워낼지도 모른다.
내가 살 수 없음에, 창조욕이 솟구치는데, 백화점을 나서면서는 상품들의 처연한 질서에 녹초가 되어 그 창조욕은 결국은 도피였음을 재확인하는,
자본주의라는 금박을 덧씌운 두려운 거울이자 자화상.
내게 세상은 온통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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