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는 참 짜릿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뭔가 성장이 더뎌지는 느낌도 들지만 뭐 어때, 당장 행복한데. 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열정을 다하고 싶은 분야를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도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까지가 내 인생 전반의 가치관이다.
아닌 척했지만, 부쩍 아쉬움을 느낄 일이 많았다. 나에게 걸어진 수십 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슬슬 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대부호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쯤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모 기업에서 나에게 책정한 가격표는 생각을 웃도는 수준으로 평범한 것이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벗어날 의지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가장 고요한 방식의 자극을 느낀다.
신이시여, 왜 성취보다 회피가 낙원에 가까운 것만 같을까요. 아니 어쩌면 당신에게 묻는 것조차 핑계는 아닐까요(무신론자임).
한편, 필자는 축구를 단순한 관심 이상으로 좋아한다. 성격이 너무 한결같은지 직접 경기를 뛰는 것보다는 경기를 보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22인의 사내가 초록 잔디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고있음을 감상하다 보면,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줄 수 있냐는 염치 없는 부탁이 절로 나오는 그들의 주급 따위 하나도 부럽지 않다. 전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리그에 소속되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축구마저 누워서 보는 내가 감히 그것을 부러워할 자격 따위 없다.
'리산드로 마르티네스(이하 리산마)'라는 선수가 있다. 소속팀은 '대황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포지션은 중앙수비수이다.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초 명문 팀으로 이적한 한국의 중앙수비수 김민재의 동양인스럽지 않은 피지컬을 본 적이 있을 것이며, 큰 체격이 중앙수비수의 특징이자 조건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리산마의 프로필상 키는 175cm. 소개팅에 나가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신체 프로필을 보유한 그가 일주일에 받는 급여는 12만 파운드(한화 약 2억 원, 추정치)이다.
리산마는 치명적인 단점을 여러 장점으로 상쇄한다. 왼발잡이인 그는 공격수의 압박 사이로 전진패스를 곧잘 연결하며, 볼 간수 능력도 준수하다. 공중볼 경합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피지컬 싸움보다는 낙구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공격수에게 공이 도달하기에 앞서 볼을 끊는 방식의 플레이를 즐긴다. 자신의 단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를 정확히 아는 선수다. 무엇보다 그는 '도살자(The Butcher)'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매 경기 투쟁심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인다. 그는 골 셀레브레이션에서마저 몸을 사리지 않는다.
누가 봐도 태생적 한계가 존재하는, 수비 따위 좀 못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을 완벽한 핑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리산마는 걸출한 공격수의 공을 멈추게 하며 누군가의 연봉이라 해도 많을 액수를 주급으로 받아간다. 그에 비해 너무나도 하찮고 귀여운 나의 핑계는 사람을 이토록 부끄럽게 만든다. 이 와중에도 노력도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어디까지 평범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질을 시작하면서부터 계속해서 멋에 관해 이야기해왔고, 내가 아는 한 핑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멋이 없다. 언제쯤이면 나도 필드 위의 리산마처럼 끊임없이 갈망하고 포효할 수 있을 것인가. 당장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일단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이만 글을 줄이고 잠이나 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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