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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by ALGORITHM

필자는 겨울철만 되면 고민이 생기는데, 바로 외투 안에 받쳐 입을 상의를 구매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튀는 것은 멀리하고 또 너무 무난한 것은 싫어하는 성격 탓에 적당히 포인트가 되는 상의를 찾곤 하는데, 유난히 상의에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게 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몇 년째 옷장에는 아우터만 꾸준히 추가되고 있으며, 그저 그런 속차림을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엔 한 해동안 가장 큰 패션 행사인 블랙 프라이데이가 있었다. 평소에는 마주하기 힘든 커다란 할인폭의 향연은 일상에 지치다가도 쇼핑하는 시간 정도는 확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평소에 적당히 맘에 들어했던 롱 슬리브 티셔츠의 할인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래 쇼핑이 으레 그러하듯, 딱히 필요하지 않은 품목들에도 눈길이 가게 되었으며, 며칠 전 편집샵에서 눈독 들였던 머플러가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것까지 발견하고야 말았다.


필자는 평소에 월급을 받으면 그중 쇼핑에 할당할 돈을 미리 정해두곤 하는데, 이번 달은 그 티셔츠와 머플러를 구매하면 딱 적당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구매하려는 찰나, 필자로부터 해당 머플러의 할인 소식을 공유받은 여자친구도 구매 의사를 밝히는 것이다. 그때 나는 커플이 같은 제품을 각각 따로 구매하는 행태는 구리고 정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같은 제품을 두 개 구매할 필요가 있나? 하나로 공유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 멋없음을 느꼈고, 오랜만에 커플 아이템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티셔츠와 머플러의 가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머플러 두 개를 구매하고 나니 이번달 쇼핑비 한도는 꽉 차게 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장바구니에 담긴 티셔츠가 갑자기 이전보다 맘에 들지 않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멋쟁이가 될 수 없으며, 조금 더 멋진 다른 티셔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티셔츠의 할인 종료를 지켜만 보았다.


필자는 옷을 사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야 더욱 빠르게 멋쟁이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같은 제품을 두 개 구매하며 다른 아이템을 포기하는 다소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이유는 패션보다 여자친구를 더욱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녀에게 구리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만일 내가 패션도 여자친구처럼 사랑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티셔츠를 샀겠지만, 그러지 않은 걸 보니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러니 옷에는 그 정도의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갑자기 취향을 바꿔가면서 그 옷을 사랑하길 포기한 것이다.


사랑이 아닌 돈이 한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럼 나는 돈과 돈을 버는 행위를 그렇게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돈보다도 맨유를 덜 사랑하기 때문에 백수 시절에 늘 챙겨보던 새벽 경기를 포기하는 데에 익숙해졌다(일어나 보면 처참히 발려있는 상황이 잦아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을 늘리면 내가 애정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MC 유재석은 한 몰래카메라에서 "일도 하면서 여자친구도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매니저의 고민에 대해 "일도 열심히 하면서 여자친구 만났을 때 잘해줘"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랑에 댈 수 있는 핑계 따위는 없으며, 더욱 부지런하게 움직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정신과 육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나 자신을 가꾸고 돌보며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 흔해 빠진 조언의 논리를 몸소 체험하니 방정식이 하나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간 내가 애인에게 헌신하면서 사고 싶은 모든 옷을 사고 새벽에 맨유 경기를 모두 챙겨보며 출근도 제 때 하고 뛰어난 성과를 올려 돈을 많이 벌지 못한 이유는 나 자신을 그만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헬스장을 일주일에 한두 번 가고 책을 열 장 넘기며 뿌듯해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앞서 나열한 것들을 하나하나 더 챙겨나가겠다. 다만, 누워서 쉬는 것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인데, 다른 것들과 동시에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욱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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