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주의와 식민사관을 극복하자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근거도 없이 과장해서도 안 되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관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역사 기술이 오도되는 일을 좌시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중화주의 및 식민사관이 남한에서 아직도 역사적 정설로 인정받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역사 기술은 사람들의 뇌에 오래도록 각인되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왜곡된 역사 기술을 바로잡으려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바로잡아야 민족의 정기를 떨칠 수 있다.
우리민족도 중국 못지않게 기록을 중시했지만 외침이나 국내적 요인으로 수많은 역사서가 사라져 버렸다. 모든 사물에서도 뿌리가 중요하듯 역사에서도 민족의 기원이 중요하다. 우리 민족의 뿌리는 고조선인데 관련 기록은 중국 사서의 여기저기에 파편으로, 그것도 왜곡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우리 내부의 고조선 관련 역사서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희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 숙종 때 북애자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쓴 《규원사화》는 우리 상고사 역사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처지에서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규원사화》는 조선의 국사國史가 없음을 한탄한 저자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이명이 지은 우리나라 고대사 책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인용하여 썼다. 《진역유기》는 발해 역사책인 《조대기朝代記》를 참고하여 썼다. 세 책의 계보가 《조대기》 ⇒ 《진역유기》 ⇒ 《규원사화》로 이어진 셈이다.
《규원사화》에는 고조선 시대 제1대 단군왕검부터 제47대 고열가 단군까지 1205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단군왕검 이전의 18대, 1565년의 환웅의 계보도 적혀 있다. 《규원사화》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서기전 3,898년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고 엄연한 역사서이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 《진역유기》를 참고하여 썼다. 기록이 전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검증도 하지 않은 채 기록을 몽땅 거짓으로 몰아가서도 안 된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서는 외침으로 불타버리거나 빼앗겨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내부에서 의도적으로 없애기도 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3년 5월 26일(양력 1457년 6월 17일)에 세조는 팔도 관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왕명을 내렸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의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3인이 지은 《수찬기소》 1백여 권,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서적은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만약 갖고 있는 자가 있으면 진상하도록 하라. 대신, 원하는 책을 내려줄 것이다.
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조선 관련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이때 수거된 뒤 사라졌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에 비견할 ‘조선판 분서' 사건이며 조선의 금서 목록이었다.
‘자진해서 금서를 바치면, 보고 싶은 책으로 바꿔주겠다.’는 세조 때의 금서 수거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 때는 상당히 과격해졌다. 거의 분서갱유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예종이 내린 하교에서는, 한성부 주민은 10월 그믐까지, 한성부에서 가까운 도道의 주민은 11월 그믐까지, 먼 도의 주민은 12월 그믐까지 금서를 바치라고 하면서 형벌을 예고했다. 「예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책을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주고, 상을 받기를 원하는 자나 공노비ㆍ사노비에게는 면포 50 필을 주기로 한다. 만약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고발하도록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위와 같은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
세조와 예종 부자의 우리 역사 말살 정책이 이 정도로 극심했다. 우리 민족의 고대 및 중세 역사서의 수량이 빈약하지만 중국의 사서를 비판적으로 읽고 각종 유물•유적을 참고하면 역사의 실제 모습에 다가갈 수 있다. 한민족의 역사를 실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것은 의지와 철학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의 국사國史가 없음을 한탄한 《규원사화》의 저자 북애자에게 부끄럽지 않은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