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의 체현자, 정도전과 조광조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근근이 수명을 연장하던 고려를 쓰러뜨릴 대의명분을 토지개혁에서 찾았다. 당시는 친원파 및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제멋대로 겸병하여 백성은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었다. 정도전은 《맹자》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민본사상을 받아들였고 유배 중인 전라도 나주에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피부로 느끼며 혁명을 꿈꾸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적 신진사대부는 토지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어 민심을 끌어 모았다. 물론 애초의 토지개혁 구상에서 후퇴했지만 상당히 파격적으로 토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이다. 누가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 주느냐에 따라서 민심은 요동치기 마련이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도 정도전 못지않은 도학자이며 개혁가였다. 당시도 공신들을 포함한 훈구세력이 온갖 방법으로 백성의 땅을 빼앗아 독차지했다. 조광조를 포함한 사림 세력은 모든 토지를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주자는 균전제를 목표로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1인당 토지 소유 한도를 정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조광조는 공신의 수를 줄이는 등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정하게 다스리니 사람들이 감동하고 복종하여 매번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주인) 오셨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백성들은 임금이 아니라 조광조를 주인으로 여긴 셈이다. 조광조는 백성의 질곡을 걷어내려 선비정신을 불태우며 개혁을 추진하다 무능한 악덕 군주 중종에게 이용만 당하고 사약을 받아 38세에 스러져갔다.
맹자는 “뜻있는 선비는 지조를 지켜, 죽어 묻힐 곳이 없이 시신이 도랑이나 산구덩이에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는 선비는 의義를 보고 행하다가 자기 머리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는 이와 같은 뜻있고 용기 있는 선비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정도전이나 조광조처럼 어떤 난관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고단한 삶의 개선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해결하려 한 정신을 지금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한다. 오직 자신의 영달이나 패거리의 득세만을 위해 두 손을 모은 채 아부하고 눈과 머리를 굴리는 모리배들이 득실거려 여기저기에서 악취가 난다. 대쪽 같은 선비정신으로 불의와 부도덕한 권력에 항거하고 시민을 위해 발분의식을 보여 시민들이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따를 주인이다.’고 말할 수 있는 공직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공자는 “옛날에는 자신을 위하여 배웠는데, 지금은 남을 위하여 배운다.”고 하였다. 자신을 위하여 배웠다는 말은 수양과 수신을 목표로 했다는 의미이고, 남을 위하여 배웠다는 말은 남에게 잘 보이거나 인정을 받아 출세나 성공의 도구로 삼았다는 뜻이다.
위정자들이 입으로만 정도전이나 조광조를 존경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서 현실에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정도전과 조광조의 후예들이 자신을 위하여 배우며 선비정신으로 무장하고 자신만의 성공이 아닌 시민의 삶의 개선과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온몸을 던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