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찌질이 임금 선조와 인조
선조는 일본, 인조는 청의 침략을 받아 국토와 백성을 유린당한 용렬한 임금들로서 역사의 죄인이다. 둘은 몇 가지 점에서 닮았다.
첫째, 왕위 등극 과정의 정통성 결여이다. 선조는 명종의 명시적인 유언 없이 인순왕후와 이준경 등의 공모로 등극했다. 인조는 명•청 교체기에 현명한 중립외교를 펴던 광해군에 맞서 숭명반청의 논리를 앞세워 쿠데타로 집권했다. 둘째, 두 임금은 사전 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전란을 자초했다. 조선 통신사가 갖고 온 도요토미의 국서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적혀 있었으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차고 넘쳤지만 선조는 안일하게 대처했다. 인조는 명나라 패전 장수 모문룡을 지원하여 후금을 자극해 침략을 자초했고 이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났지만 외교와 국방을 등한시하여 아무런 준비 없이 병자호란을 당했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바닥에 찧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치욕적인 예를 행하였는데 이마를 찧는 소리가 청 태종의 귀에 들려야 하고, 이마에서 흐른 피가 양쪽 어깨를 적셔야 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인조 본인은 그렇다 치고 애꿎은 50~60만 명의 조선 백성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남자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맞아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여자들은 성노예 생활도 감수해야 했다. 셋째, 세자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롭혔다. 선조는 임란 당시 분조分朝(선조의 본 조정과 달리 유사시를 대비해 나눈 조정)를 이끌며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세자 광해군에게 걸핏하면 선위 파동을 일으키거나 영창군이 태어난 뒤에는 광해군에게 문안조차 말라고 꾸짖어 광해군이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게 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자격지심을 느꼈던 못난 아비였다. 인조는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갔다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신하들이 축하 인사를 하는 것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으며 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갑자기 죽었다. 인조는 세자가 성리학이 아닌 서양 문물이나 사상을 흡수한 점을 미워했고 청의 힘을 빌려 국왕 자리를 빼앗을까 의심했다.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적고 있다. 독살설을 제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조는 또한 며느리인 세자빈 강 씨를 각종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기조차 했다. 이들 중 두 명은 제주도 유배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지독한 아비이자 시아버지이며 할아버지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의 무대는 시대별로 다른 인물들이 약간의 다른 옷을 걸쳐 입고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선조와 인조는 각기 다른 시대에 부정적 의미의 같은 역할을 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역사를 흔히 ‘거울鑑’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능 군주의 대명사 선조와 인조를 통해 반면교사 및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